여행기

리야드의 대문 [마라케쉬, 모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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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마라케쉬를 여행하는 방법
이 이야기는 여행잡지 Artravel #00호에 게재된 여행작가 허선희님의 여행기입니다. Artravel과 위시빈의 협업을 통해 지면에 모두 담지 못했던 사진과 방문했던 명소 정보들을 추가해 Artavel 매거진에 실렸던 특별한 여행이야기를 다시 발행합니다.
  • 마라케쉬

    Marrakesh 40000, Moroc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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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포테(capote)의 물결이 아프리카의 붉은 모래로 물드는 2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발한 파란색 사자(라이언 에어)는 하늘을 달려 나를 북아프리카의 천년고도 모로코 마라케쉬로 데리고 갔다. 창공에서 보이는 거친 아틀라스 산맥과 붉은 사막은 내 안의 설렘과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처음 느껴보는 아프리카의 고온 건조한 날씨, 습도가 느껴지지 않는 텁텁한 공기는 새로운 세계에 도달했음을 실감하게 했다.
오래된 여행의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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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바라본 마라케쉬의 모습은 전 세계인이 모이는 포용과 화합의 도시라 불리는 곳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한산했다. 그나마 보이는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그늘에서 쉬고 있었고, 상점들도 텅 빈 모습이었다.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모스크들은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고 싶은 듯 솟아 올라가고 그 아래로 놓여있는 붉은 건물들만 여행자의 시선을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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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모로코의 전통 가옥인 리야드(Riad)의 옥상에서 붉은 도시의 색깔에 묘하게 빠져들 무렵. 어디서 들려온 아단(예배에 참석해 달라는 부름)을 따라 언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인파가 예배를 위해 모스크로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이슬람력의 아홉째 달인 라마단 기간의 스물 한번째 금식일이다. 정오에 행해지는 두 번째 기도시간 죠하르(Zohr)를 알리는 무엣진(아단을 알리기 위해 코란을 낭송하는 사람)의 소리가 나를 이 구역의 이방인으로 완벽하게 구별 짓는 것 같았다.
여행은 현실의 역할을 벗어 던지고 일상에서 탈출해 나를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특히 몇 년 전까지 내가 원했던 여행은 일상에서 누릴 수 없는 호화로운 휴식을 갖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여행을 업으로 삼은 나에게는 꿈 같은 멋진 기회들이 많이도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캄보디아의 씨엠립을 방문하게 되었고, 한 고급 호텔에서 제공하는 투어의 일환으로 그 곳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산다는 톤레삽 호수를 방문하게 되었다. 호텔에서 특별히 제공한 단독 배에서 고급 샴페인을 마시는 동안 내 앞에 까마득하게 펼쳐지던 풍경. 더러운 흙탕물에서 헤엄치며 웃는 아이들과 코카콜라 광고로 뒤덮인 침몰할 듯한 작은 배를 탄 채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었다. 그순간이 내가 믿었던 여행의 정의에 균열이 찾아 들었다. 나만 행복한 여행- 부끄러웠다.
고급 보트를 타고 샴페인을 마시며 그들을 바라보던 내가 더 행복했을까? 내가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면 아니 그들을 바라보는 안락한 배 위가 아니라 다만 그들 옆에 있었다면 조금은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가진 것 중 일부를 나눌 수 있는 여행, 나와 그들 모두가 동등하게 같은 눈높이로 서로를 만나는 여행, 의미 있는 소비가 가능한 여행을 꿈꾸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여행은 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그리고 이제는 아프리카의 북쪽 모로코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나의 새로운 여행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대중교통 이용하기, 현지인들과 어울리기, 외국자본이 아닌 현지자본으로 세워진 숙소 투숙하기, 적은 돈이라도 기부하기, 그리고 환경을 생각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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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마 엘프나 광장

    Jamaa ElFna, marrakech, Morocco

골목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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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온갖 부류의 현지인들이 모인다는 마라케쉬의 제마 엘 프나(Djemaa el Fna) 광장이었다. 유네스코 세계인류문화유산의 한복판에서 이 곳에 정착한 베르베르인 음악가의 후예, 뱀 마술사, 이야기꾼, 악기 연주자, 무용수 등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컸다. 특히, 11세기 사막에서 물을 찾아 헤매다 아틀라스 산맥을 발견하고 정착한 베르베르인들. 긴 생명력으로 사막을 지나 물을 발견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이곳 저곳을 헤매며 유목민으로 살아오다가 결국 아틀라스 산맥 줄기 끝 생명이 흐르는 곳에 정착한 그 사람들 틈에 들어가 그들의 생명력을 빌려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제마 엘 프나 광장의 매일 달라지는 음악소리, 춤 사위도 매력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인위적이지 않은, 꾸밈없는 사람들의 표정이 가장 좋았다. 항상 웃는 얼굴로 서비스해주는 관광지의 사람들과는 분명 다른 얼굴. 때론 찡그리고, 때론 거친 자신 그대로의 얼굴에서 "나는 살아 있어요", "나는 감정이 있어요", "나는 기뻐요! 슬퍼요!"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저무는 해를 따라 도시의 정적이 깨지기 시작했다. 제마 엘 프나는 이제야 마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처럼 생동감에 차오른다. 빛이 있을 동안의 단식이 끝나고 어둠이 깔리자 첫 식사인 이프타르(Iftar)를 하러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 순식간에 변한 도시의 모습에 낯선 문화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까지, 뭔지 모를 흥분과 약간의 두려움 같은 감정들이 내 안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이 거리에서 많은 호객행위가 이루어지고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운 골목이 많다는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정말로 제마 엘 프나 광장에서 규칙 없이 흩어지는 골목들은 많고도 좁았다. 집 외관이나 대문에 특징이 있었다면 구별이 쉬웠을 텐데 한 두 명이 간신히 통과할만한 골목은 너무도 비슷해서 길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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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나 역시 이 낯선 골목들의 미로에서 잠시 길을 잃고 말았다. 잠시였지만, 골목을 헤매던 나는 혹시나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진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출구를 찾아 또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미로는 더 깊어졌다. 두근두근. 하지만 이내 나를 바라보는 골목 사람들의 눈을 발견하고는 그 두려움을 조금 지울 수 있었다. 나보다 더 당혹스러워 하는 그들의 눈빛. 까만 머리에 작은 눈을 가진 동양 여자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안쓰러움 같은 감정이 서려있었다. 사람의 마을, 사람의 골목이었다.
리야드 대문이 가르쳐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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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길을 잃은 이유는 대문 때문이었다. 마라케쉬의 집들은 대부분 대문이 비슷하게 생겼다. 어느 나라를 가든 크고 화려한 대문만 봐도 부유한 정도를 대충 가늠할 수 있다. 때론 부럽기도, 거부감이 들기도 하는 그런 대문 말이다. 또 대문을 보고 그 집에 사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마라케쉬의 집들은 부자든 가난하든 그 대문을 보고 크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모로칸들은 돈이 많고 적음을 자랑스러워 하지 않고 아이가 많고 적음을 빈부의 기준으로 둔다고 한다. 아이들이 그들의 미래이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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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상으로 구별하기 힘든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제야 그 집의 부유함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모로코 전통가옥인 리야드의 구조는 안이 비어있는 사각형의 형태로 가운데 빈 공간을 빙 둘러 2-3층으로 건물이 이뤄져 있다. 리야드 가운데는 정원이 하늘을 향해 열려있다. 모자이크 타일과 조각장식이 얼마나 정교한지가 고가의 가옥인지 아닌지 우리가 말하는 부잣집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물론 아프리카의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외벽에는 창문을 내지 않고 내부에서 공기가 순환되는 구조로 만들었겠지만 단지 그 이유뿐이었으랴.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보다 자신들 안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더 소중히 여기며 언제 찾을지 모르는 오아시스를 마음에 품고 광야를 건넜던 유목민의 마음은 이렇게 가옥의 형태에도 선명하게 담겨있다.
스스로 여행 배테랑이라 자부했던 나는 씨엠립의 톤레삽 호수의 경험 이전까지 대문의 크기와 화려함만을 찾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 자체로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 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두드려보고 열어봐야 한다는 걸 왜 몰랐을까. 문을 열고 들어가 사람들과 인사하고, 둘러 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를 들어보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여행. 이런 경험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훨씬 깊고 풍성한 추억을 품고 있다. 관광객이 아니라 현지 사람들의 삶 속으로 마음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면 비로소 여행은 그림자를 걷어내고 삶의 현장들을 보여준다. 끝이 없이 미로가 이어지고, 골목과 골목 사이로 모로코 마라케쉬의 공평한 대문들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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