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어느 겨울에 여름여름 섬 [마요르카,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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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요르카의 여름이야기
이 이야기는 여행잡지 Artravel #14호에 게재된 여행작가 임성연님과 나빈님의 여행기입니다. Artravel과 위시빈의 협업을 통해 지면에 모두 담지 못했던 사진과 방문했던 명소 정보들을 추가해 Artavel 매거진에 실렸던 특별한 여행이야기를 다시 발행합니다.
  • 팔마 데 마요르카

    Palma (Mallorca), Balearic Islands, S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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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 사과인 듯 새빨갛게 반짝이는 사과와 커피를 들고 짐을 챙겼다. 바다를 보고 싶었던 중에 저렴하게 나온 마요르카 비행기. 티켓을 무작정 끊어놓고 찾아보니 저렴할 때는 마드리드에서 왕복 3만 원으로도 갈 수 있는 흡사 스페인의 제주도 같은 곳이다.
팔마 마요르카. 이곳은 한 밤인데도 24도로 따뜻하다. 아무도 없는 골목 끝 3층에 위치한 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 도착하자마자 시원한 물을 가져다 주며 이제야 모든 손님이 다 왔다며 신나하는 주인과 마주했다. 그 밤에 뭐가 그리 좋은지 나누는 말마다 손뼉을 치며 웃는다. 참 스페인 같은 사람. 아무리 많아도 15명 정도 인원만 받는 family hostel 안에 주인이 틀어놓은 음악과 반짝이는 전구가 맞물려 이 밤을 더욱 깊게 만든다.
구름 딱 두 덩이와 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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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져 지도도 없이 무작정 호스텔 문을 밀고 나와 골목으로 들어섰다. 자연의 섬 마요르카에 대한 내 기대를 가볍게 뒤집어 버리는, 골목마다 위치한 감각적인 반전의 상점들. 섬이니까 바다를 마음껏 볼 수 있겠지, 하고 들어선 곳인데 제주도 2배 크기라니, 섬을 닮지 않은 섬이래도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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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중심으로 타파스 바와 온갖 쇼핑거리가 몰려있고, 사이사이 뻗어나간 골목에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빈티지 샵, 핸드메이드 샵 등 구경할 곳들이 많다. 한참을 고삐가 풀려 이것저것 작은 소품들을 마구 사고 나서,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호스텔 근처 동네 타파스 집에 들어섰다. 맛있는 걸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타파스 집 아들은 영어를 못한다며 아빠를 불렀고, 아빠는 다른 직원을, 그 직원은 또 다른 친구를 불러가며 주문을 받는다. 그때, 이 모습을 뒤에서 전부 지켜보던 할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요르카는 정말 사람들이 착하고 다 좋은데, 제일 큰 단점이 영어를 잘 못한다는 거야. 못하는 사람은 아예 못하지." 나는 속으로 '그래도 상관없어요. 아니, 어쩌면 더 좋은지도 모르죠'라고 대답했다. 여행자를 위한 스페인이 아니라, 날 것 그대로의 스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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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가는 다른 골목에서 마주친 책방. 옛날 영화 포스터가 가득한 파일 속에 Corea, Paralelo 38이라고 적혀있다. 혹시 38선을 뜻하는 건가. 누군가의 오래된 일기장도 훔쳐보고, 낡은 삽화 책들을 뒤적이다가 이번에는 책방 구석 밑에서 우연찮게 1933년 지리학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한국을 찾아볼까 펼쳐 본 지도에 역시 Corea라고 쓰여있었다. Korea가 아닌 Corea가 새겨진 문서는 마치 책장 서랍에 넣어둔 꾸깃하게 늘어진 지폐 같았다. 아시아 부분 지도에서 동해는 일본해로, 심지어 한국과 일본이 통틀어 일본이라고 적혀있는 문구를 발견했다. 뒷장의 설명을 보니 Imperio del Japon. 맞다. 1933년 시기상 일본의 강점 하에 있었던 대한민국. La Corea, pertenece al Japon : 일본의 소유라는 슬픈 문장. 발행연도 1940년 책에도 el continente asia- peninsula de Corea, 정말 오래된 1920년도 책 지도에도 Chosun은 Imperio del Japon이었다.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 고향의 이름을 이렇게 발견하는 것은 참 묘한 일이다. 손도 무겁고 마음도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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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가 놓여있던 호스텔 거실에 잠시 앉아있다가 간단히 맥주를 사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쏟아지는 별은 아니었지만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니 구름 딱 두 덩이와 꽤나 많은 별들이 보인다. 바람이 가끔 발끝을 스쳐갈 뿐 온도에 변화가 없고, 뒤에 걸려있는 전구 덕에 세상이 다 아늑하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성당이 보이고 왼쪽으로 돌리면 첨탑이 보이며, 그보다 높은 건물은 없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잠시 눈을 감았다. 불현듯 서울 달동네 옥상에 올라온 것 같은 기분. 내가 나고 자란 땅의 이름을 자꾸 생각했다. Korea,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온전한 땅.
  • 소예르 항구

    Passeig Es Traves, 3, 07100 Port de Sóller, Illes Balears, Spain

뭐 어때, 지중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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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대부분이 문을 닫고 쉬는 일요일, 무작정 걸어 나와 버스를 타고 어딘가 떠날 생각으로 에스파냐 광장 옆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기차와 메트로, 버스를 탈 수 있는 터미널. 호스텔에 있는 마요르카 여행 책을 뒤적이다가 마음 가는 곳 몇 군데를 지도에 표시해두긴 했는데,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해서 타임테이블을 확인하며 곧장 떠날 수 있는 버스를 살폈다. 그리고 아무 계획 없이 무작정 5분 뒤에 떠나는 소예르 항구행 버스에 올라타기. 자고로 소예르는 1912년부터 운행된 나무로 만들어진 기차를 타고 가서 항구까지 연결된 오래된 트램을 타야 한다고 하지만, 팔마에서 무작정 아무 데나 갈 생각으로 버스터미널에 갔기에 오늘은 사정이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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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마 시내를 벗어나니 이제야 섬 같다. 소예르를 지나쳐 10분 더 가면 Port de Soller. '말도 안돼! 여기가 소예르 항구라고?' 의심스러울 정도로 산 중간에 내려준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5분여 걸으니 그제야 항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주 작고 아담한 항구 마을을 따라 레스토랑과 카페가 들어선 곳. 항구 바로 옆 비치와 근처 곳곳에서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 팔마의 항구에 비하면 너무 작아 초라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반대로 생각하면 이곳은 산과 물 같은, 자연의 여백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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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게 일렁이는 바다 곁을 한참 맴돌고, 속이 훤히 비치는 투명한 바다, 잔잔하게 움직이는 물결에 나도 모르게 풍덩거리며 수영도 했다. 물론 보기와 다르게 적응이 필요한 차가운 바다였지만, 햇빛에 달궈진 돌 위에 앉아있으니 물기도 금방 말랐다. 늦은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 항구와 소예르 마을을 이어주는 오래된 트램을 탔다. 해안선을 따라 느릿느릿, 아주 천천히 산길을 지나, 소예르 마을 골목을 지나, 마침 파티가 벌어지던 광장 앞을 지나, 소예르 기차역에 도착한다. 잠시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소예르 항구에서부터 사람들을 가득 채워 도착하는 만원버스에 올랐다. 꽉꽉 채운 버스에서 마요르카 사람들의 냄새, 여행자들의 땀냄새가 났다. 실컷 도시를 헤매다, 항구를 헤매다, 광장을 헤매다, 또 삶을 헤매다 저녁이 되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냄새. 나는 은근 이 냄새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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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자전거를 꼭 타보겠다며 일찍부터 무장을 하고 나섰다. 항구를 따라 걸으며 자전거를 빌리러 가는 길, 웅장하고 거대한 국립도서관이나 박물관 같은 팔마의 우체국을 지나쳤다. 어렸을 적부터 우체국이 익숙했던 나는 종종 우표를 사러 갈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웅장하진 않더라도 오래된 도서관 같은 모습을 가진 우체국이라면 찾아가는 발걸음이 더 잦아지지 않을까. 전화와 메신저, 문자메시지 대신, 몇 번쯤은 우체국에서 편지를 보내며 소중한 사람들에게 안녕, 하고 인사하진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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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선을 따라 위치한 곳에서 5유로에 자전거를 빌렸다. 천천히 걸어가는 것보다 빠르지만 여유롭게 굴러가기에 좋다. 그 동안 튼튼해진 다리로 자전거쯤이야, 하고 단단히 착각하고 앞을 향해 달렸지만 두 달 동안의 여행 때문인지 다리에 갑작스레 무리가 왔고 오르막길도 아닌 길 위에서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어 자전거를 끌고 걸어야 했다. 그리고는 평지에서 다시 앉아 아주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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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내리막길, 뜨거운 햇빛에 흘린 땀을 식혀주는 바람과 펼쳐진 전망대 앞 지중해가 보인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지중해 발레아레스는 사이다처럼 맑고 투명했다. 빠져들 듯 구석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밑으로 내려갔다. 해변이라고 볼 수 없는 곳이지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햇빛 속에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 옷을 입고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다들 태연하게 돌아다녔다. 아주 조금 망설였지만 결국엔 나도 훌훌 발가벗고 지중해에 몸을 부딪쳤다. 뜨거워진 몸을 식히기에 딱 좋은 온도. 파도가 칠 때마다 다가오는 투명한 거품이 이제 막 뚜껑을 열고 잔에 따라 마시는 시원한 사이다같다. 찰랑이는 잔에 부딪쳐 반짝인다. 하나도 창피할 것 없어. 뭐, 어때. 지중해잖아.
  • 팔마 데 마요르카

    Palma (Mallorca), Balearic Islands, Spain

우리, 더할 나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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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마 마요르카에서 마지막 날 아침. 여전히 호스텔 주인 부부는 밝게 웃으며 크게 아침인사를 해왔고, 발랄하게 하이파이브를 하고 식탁에 앉아 서로 눈썹을 꿈틀거리며 웃다가 조식을 준비한다. 씻고 짐을 챙기는 나를 보고 "써어언~(항상 이렇게 길게 불렀다), 오늘 떠나는 날이지?" 라며 다가왔다. 오후에 약속이 있다며 미리 인사를 해야 한다는 그녀는 나를 힘껏 껴안아 등을 토닥거리며, 어디에 있든 또다시 만나자는 말을 건넨다.
"정말 만나서 좋았어! 비행시간 전까지 짐 놓고 마지막으로 팔마를 즐기다 와. 갔다 와서 샤워도 하고, 네가 좋아하는 커피도 마시며 쉬다가 가. 물론 열쇠도 갖고 있어도 돼." 그녀의 말투는 늘 그랬다. 샤워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쉬다가~아! 그래서인지 말끝을 길게 늘릴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웃게 된다. 늘 있던 떠남이었는데 오늘만큼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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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에게 추천했던 마요르카 벨베르 성, 마지막 하루는 그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친절히 버스 노선이 표시된 영수증을 뽑아주며 탑승한 곳과 내릴 곳을 표시해주고는, 내가 내리자 문을 열고 "뒤 돌아서 표지판을 보고 올라가면 금방이야!" 라고 소리친다. 이 아무것도 아닌 말에 무언가 울컥, 하는 게 있다. 그 흔하고 많은 여행자에게 저리 살뜰하고 다정하게 인사하는 사람들이라니. 그리고 벨베르 성정상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하늘. 멀리 팔마의 시내와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이비자 등으로 향하는 배가 기대어있는 항구가 보인다. 한참 그 풍경을 마음 속에 새겨 넣다가 잠깐 들렸던 식당 아저씨의 대답을 떠올렸다. 모두 자신의 고향 음식이고, 자신이 직접 만드는 수제 음식이라고 자랑하는 아저씨에게 왜 마요르카에 왔느냐고 물으니 단지 햇살 때문이란다. 1년 전 팔마에 왔다가 따뜻한 햇살에 반해서 고향인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운영하던 식당을 접고 이곳에 오픈했다고. 정말 햇살 때문이냐 다시 물으니, 볼로냐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데 이곳 팔마에서는 전 세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은 이유도 한 몫 했다며 활짝 웃었다.
마요르카는 그런 힘이 있는 곳이다. 그런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과, 이들이 더없이 사랑하는 풍경이 있는 곳이다. 벌거벗고 지중해에 빠질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마음이면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한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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