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설국 피오르 열차 [송네피오르, 노르웨이]

조회수 51
노르웨이 송네피오르 기차 여행
이 이야기는 여행잡지 Artravel #24호에 게재된 여행작가 RAE님의 여행기입니다. Artravel과 위시빈의 협업을 통해 지면에 모두 담지 못했던 사진과 방문했던 명소 정보들을 추가해 Artavel 매거진에 실렸던 특별한 여행이야기를 다시 발행합니다.
  • 오슬로

    Storgata 28A, 0184 Oslo, 노르웨이

  • 본문 이미지

오슬로는 내내 우중충하고 우울했다. 내가 여행한 그 어느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도 가장 무미건조 했다. 콘텐츠가 부족했다고 할까? 뭉크의 그림과 무섭게도 직선적인 오슬로 시청을 빼면 없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 중에 가장 부유한 나라라고 해서 너무 많은 기대를 했을까? 나는 어서 오슬로를 떠나고 싶었다. 어쩌면 오슬로 입국 심사에서 당했던 굴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비행기 출구 앞에 따로 붙잡혀 노르웨이 땅을 밟기도 전에 이것저것 의심 가득한 질문을 받았다. 아무튼 서둘러 짐을 싸서 오슬로를 떠났다.
그리고 나는 짧지만 강렬한 송네피오르 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 오슬로 중앙역

    Jernbanetorget 1, 0154 Oslo, Norway

노르웨이 숲으로
  • 본문 이미지

기차 여행의 묘미는 비교적 먼 목적지를 향해 느긋하게 사색하며 떠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나의 노르웨이 기차여행은 그리 길거나 여유롭지는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비록 짧았더라도 아주 강렬한 경험이었다는 점이다. 오슬로에서 출발해 베르겐까지는 비행기로 고작 1시간 거리다. 그러나 이 길을 12시간이나 기차와 배를 갈아타며 멀리 돌아가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아침의 오슬로역은 붐볐다. 규모도 상당히 컸다. 특히나 천고가 매우 높았다. 평균 180cm가 넘는 북유럽인들 키에 맞게 설계된 것 같았다. 묘하게도 시기는 오월인데 사람들의 옷차림은 겨울이었다. 키가 크고 새하얀 젊은이들이 어깨에 거대한 스노보드를 지고 있었다. 하와이였다면 새까맣게 그을린 청년들이 상의는 홀딱 벗은 채 스노보드 대신 서핑보드를 들고 있었겠지? 과연 북유럽 기차역다운 모습이다.
여담으로 노르웨이에 와서 가장 먼저 놀란 건 그들의 평균 신장이었다. 키가 크다고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니 그들의 신장은 상상 이상이었다. 심지어 대부분의 여성들도 나보다 컸다. 그 사이를 돌아다니니 새하얀 학 사이로 빨빨거리며 헤매는 웰시코기가 된 기분이었다.
  • 본문 이미지

  • 본문 이미지

오슬로에서 뮈르달 행 기차에 올랐다. 사실 북유럽은 워낙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이다 보니 살짝 도시를 벗어 나기만 해도 바로 시골이다. 노르웨이 인구가 500만명 정도인데, 넓은 땅덩이에 비해 턱없이 적은 인구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빈 터였다. 푸른 풀밭과 숲,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산.
조금 진부하지만, 마치 경춘선을 타며 김현철의 노래 <춘천 가는 기차>를 듣는 것처럼 나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재생했다. 기차 안은 더할 나위 없이 조용했다. 덩치가 큰 북유럽 사람들의 말소리는 정반대로 엄청 조용했는데, 기차가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소리와 적절하게 섞이며 달콤한 자장가가 되어 주었다. 졸다 깨기를 반복, 4시간 정도가 흘렀을까?감겨있는 눈꺼풀을 뚫고 빛이 한 가득 들어왔다.
5월의 설국
  • 본문 이미지

어느 순간 창 밖은 하얗게 눈 덮인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기는 5월 중순, 한국은 서서히 더위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그 시기에 나는 지구 반 바퀴 반대편에서 설국을 향해 달려 가고 있었다. 어쩌면 영화 「설국열차」의 앞쪽 칸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빠른 속도로 달리는 기차 밖 모든 것이 새하얀 세상. 와!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얌전하게 앉아 있던 북유럽 사람들도 창 밖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멋진 광경이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눈으로 덮인 대지를 나는 아직 본적이 없었으니.
바쁜 세상과는 상관없이 지난 수십, 수백 년간 아무런 소란도 없었을 것 같은 고요한 눈밭, 아무도 없음직한 곳에 거짓말같이 서있는 작은 산장, 저곳까지 어떻게 갔을까 싶은 설원의 사람들과 그들의 패러글라이딩 스키까지. 지금껏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 본문 이미지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아직도 내가 해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음을 느낀다. 아직도 내가 가보지 못한 곳들이 너무 많음도 느낀다. 언젠가 이곳에 다시 와서 나도 저들처럼 새하얀 눈의 들판을 패러글라이딩 스키로 달려볼 수 있을까? 이 전경 앞에서라면 누구라도 묻고 다시 물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뮈르달

    Myrdal, 5718 Myrdal, 노르웨이

우리의 여행과 나의 여행
  • 본문 이미지

설원을 달리던 기차는 어느덧 중간 기착지 뮈르달 역에 도착했다. 산골짜기 중간에 이렇게 역이 있다. 이 정도로 겨울일 줄은 몰라서 살짝 당황했다. 가을 아우터에 얇은 패딩조끼 하나를 입고 있었는데 이곳의 추위가 상당할 정도였으니 아마도 꽤나 북극권에 가까워서 그런가 보다. 두꺼운 점퍼로 무장한 다른 여행자들과 비교가 되었다.
뮈르달 역에서 내린 후에 반대편 플랫폼으로 건너가면 플롬바나라는 산악기차가 대기하고 있다. 매우 오래된 모습이었다. 견고하고 단단한 겉모습과 달리 안의 인테리어는 목재로 꾸며져 있어 꽤나 따뜻한 느낌이었다. 실내는 레트로한 패브릭과 통나무로 장식되었는데, 이 산악기차를 타고 1시간 좀 넘게 산길과 골짜기를 오르락 내리락 하게 된다. 산악 관광 전용 기차라서 그런지 창이 매우 넓었다.
  • 본문 이미지

여행자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자연의 진귀한 모습들을 눈과 카메라에 담았다. 철길을 어떻게 이런 산골짜기 사이사이에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근성과 노르웨이 철도 기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차는 약 25km를 운행하는데 이따금씩 잠시 정차를 하며 여행자들에게 사진 찍을 수 있는 시간을 준다. 그러면 하나같이 쪼르르 나가서 저마다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으며 주어진 5분이라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쓴다. 가끔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고, 또 누구는 풍경을 기록하며 다른 누군가는 자기 자신을 기록한다. 그때마다 나는 각자 생긴 게 다르듯 여행 법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올바른 여행은 그 누구도 정의 할 수 없다. 여행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여행의 이야기도 온전히 내 수준에서 보고 느낀 것들의 기록일 테니까.
  • Kjosfossen waterfalls

    Rallarvegen, 올란드 노르웨이

  • 본문 이미지

  • 본문 이미지

나에게 있어 여행은 평범한 월급쟁이의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 길어야 2주 정도 되는 시간에 최대한 집약적으로 다른 세상을 보고 느끼는 일. 그러니 부지런히 움직이고 열심히 먹고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돌아와서 여행의 이야기를 이렇게 사진과 글로 공유하는 것. 이것이 내가 여행을 즐기는 방법이다.
93m 높이의 키요스 폭포에서는 특별히 10분 정도 정차를 하게 된다. 산의 골짜기 사이로 엄청난 물이 쏟아 지는데 코 앞에서 보는 비주얼과 사운드는 직접 봐야 그 스케일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대로 물속으로 빠져들고 싶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 역시 이 폭포 앞에서 처음에는 공포심이 들었지만, 머지않아 그 힘찬 모습에 현혹되어 버린다. 그만큼 이 폭포는 매력적이었다.
  • 본문 이미지

  • 플롬 기차역

    Stasjonsvegen, 5743 Flåm, 노르웨이

풍경과 사람의 샛길
  • 본문 이미지

플롬으로 가는 길, 산기슭 사이로 작은 마을이 보였다. 산장 몇 채가 모여 이룬 산 속 공동체. 이 마을의 사람들은 365일 깨끗한 공기와 노르웨이의 숲, 만년설이 얹힌 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케이블TV에 개그맨 출신 진행자가 산속에서 혼자 은둔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하루 이틀 정도 함께 생활해보는 방송이 있는데, 나는 방송을 볼 때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산속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것과 생각보다 아주 잘 지내고 있다는 점에 놀라곤 한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사연이 없는 이가 없었다. 한 분의 인터뷰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사람과 돈이 싫어서 올라온 산이지만 여전히 사람이 고프다는 것. 즉, 외롭다는 얘기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곳 골짜기의 삶도 그러지 않을까? 북유럽 깊은 산골 저 작은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가슴을 달래고 있을까.
마침내 플롬역에 도착하였다. 산골짜기 중턱에 커다란 역이 위치한다.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에서 각자의 목적지로 흩어진다. 구드방겐으로 가는 뱃길과 베르겐으로 가는 뱃길로 나뉜다. 더 깊숙한 여행을 하려면 이곳에서 구드방겐으로 들어가면 된다. 나는 시간이 여유롭지 못한 여행자이기 때문에 베르겐 행 크루즈에 올라탔다. 갑판은 오픈 되어 있어 피오르의 물길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 본문 이미지

몇 만년 전에 산과 산 사이 빙하가 침식이 되어 물길이 생겼고 뱃길이 열렸다. 산과 숲과 물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고요함 속에 들리는 건 배의 엔진 소리와 프로펠러를 거쳐간 물소리가 전부였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들은 생전 보지 못했던, 깨끗하고 조용하면서도 웅장한 풍경이었다. 옆에 서 있는 2m 정도 되는 노르웨이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모습에서 바이킹이 느껴지곤 한다. 그들이 만든 사회와 공동체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적어도 이 산과 물은 천년 전 바이킹의 활약을 그대로 지켜 봤을 것이다. 그들의 용맹함과 다른 한편의 잔인함도 내려다봤을 것이다. 한참이 지나 그들의 후예가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를 만들고, 가장 우아한 북유럽 디자인의 대명사가 되는 것도 모두 바라봤을 것이다.
오로지 녹색 나무들 밖에 없던 산에 어느덧 레고 같이 반듯하고 작고 알록달록한 집들이 하나 둘씩 박혀 있다. 드디어 노르웨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나의 목적지 베르겐에 도착한다.
Comment Icon
댓글
0
프로필 썸네일 이미지
BESbsw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