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도우루 강변에서 저 강물처럼, 어느 일상처럼 [포르투,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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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고 떠난 포르투갈 여행기
이 이야기는 여행잡지 Artravel #29호에 게재된 유운상님의 여행기입니다. Artravel과 위시빈의 협업을 통해 지면에 모두 담지 못했던 사진과 방문했던 명소 정보들을 추가해 Artavel 매거진에 실렸던 특별한 여행이야기를 다시 발행합니다.
  • 리스본

    Lisbon Portug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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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 없던 여행지였다. 어쩌면 어디서부턴가 이어진 인연이 드러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유럽으로의 여행은 장마철 모아둔 빨래를 잠깐 볕이 났을 때 한꺼번에 해치워야 하는 것처럼 첫발을 디디면 반드시 여러 나라를 돌아야 하는 곳 같아 늘 미뤄두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영 오지 않을 거 같아서 한 도시만이라도 보고 오자는 맘으로 어디로 갈지를 고심했다. 여러 사람들이 추천하는 파리, 또는 TV프로그램에서 본 스페인, 아니면 영어권인 런던. 하지만 이 모든 도시를 물리치고 선택된 곳은 포르투갈의 리스본이었다. 아마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리스본 여행만으로는 영 아쉬워서 ‘끼워 넣은 곳’이 바로 포르투였다. 포르투가 내게 이렇게 큰 의미로 다가올 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리스본에서 탄 버스는 어둠이 내리는 길을 따라 그 곳으로 미끄러지듯 달려갔다. 붉게 물든 하늘과 한적한 시골풍경이 점점 검은 모습으로 변하고, 마주 오는 차량의 불빛이 더 강하게 느껴질 때쯤 버스는 컴컴한 도시 한 귀퉁이 거리에 나를 내려줬다.
  • 포르투

    Porto Portugal

주인을 닮은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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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여행지에서 첫 새벽. 자연스레 눈이 떠지고 창문을 여니 아침의 서늘한 기온이 느껴졌다. 날이 밝아오는 핑크색 하늘이 보인다. 이곳 하늘은 저런 색을 내는구나. 그렇게 포르투의 첫 날이 시작되었다. 호텔 근처로 아침 산책을 나갔다. 해는 느리게 올라오고 골목은 건물의 그림자로 푸른 그늘을 만들었다. 열지 않은 상점이 더 많았지만 이곳도 사람의 도시이기에 일상의 사람들은 분주히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며 길이 나있는 대로 걸을 만큼 걷다가 온 길을 되뇌며 돌아가다가 작은 베이커리를 발견했다. 사람들은 출근 길에 바쁜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끼어들어 나도 아침을 먹었다. 얼굴만한 크로와상과 나다라 불리는 에그타르트는 풍성했다. 베이커리의 브랜드의 커피에서는 가게를 꼭 닮은 소박하고 고소한 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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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우루 강

    Cais da Ribeira 47, 4050-511 Porto, 포르투갈

강의 온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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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채우고는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길이 나있는 대로 그저 걷는다. 작은 도시는 좁은 골목을 지날 때마다 언덕길을 오르고 내릴 때마다 그림 같은 풍경 하나씩을 내어놓는다. 멀리 도우루 강(Douro River)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방향을 다시 잡았다. 나보다 한 해 전 포루투를 다녀간 친구의 SNS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날씨는 청명했다. 친구는 날마다 도우루 강변에서 맥주를 마셨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니, 포르투에는 볼 때도 많을 텐데 왜 고작 강가에 나가 그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냐고 핀잔을 줬다. 강가에 서보니 날마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친구의 마음을 이제야 나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변의 소란스러움에도 같은 모습으로 조용히 흐르는 강물. 바라보고 있으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들여다 보는, 그리고 다 알고 있어도 일부러 아는 체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톡톡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는 것 같은. 나는 도우루 강을 앞에 두고 누군가와 따뜻하게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 동 루이 1세 다리

    Pte. Luiz I, Porto, Portugal

달콤쌉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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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정 내내 시내 구석구석 구경을 하다가도 끝은 늘 도우루 강이었다. 강변에서 군밤을 까먹으며 한없이 앉아 있거나, 돔 루이 1세 철교(Ponte de Dom Luize 1)를 넘어다니며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사진을 찍고 근처 와이너리를 구경했다. 두 시가지 사이에 강이 있고, 그 강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 도시는 다른 모습이었다. 와이너리로 올라가는 길은 돌바닥으로 되어있어서 중세로 시간여행을 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당도가 높으면서 동시에 쌉쌀하고, 위스키를 첨가해(배로 유럽 전역에 무역을 하는데, 수송하는 동안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도수도 높은 포르투 와인은 투박한 듯 꽤나 자기 멋이 강한 와인이었다. 와이너리 뜰에서 바라보는 도우루 강과 포르투 히베이라(Praca da Ribeira) 구시가지의 모습은 영화 세트장을 연상시킨다. 햇살을 받은 컬러풀한 건물과 건물 그림자로 짙은 그늘이 드리운 골목 사이사이 사람들이 움직인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와인은 맛은 차치하더라도 분위기 만으로도 나를 달달하게 채우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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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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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루 강과 돔 루이 1세 철교, 포르투 구시가지를 한 눈에 담으며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는 광경을 사진 찍었다. 사진이 업이다 보니 출장이든 여행이든 가끔은 무거운 장비에서 벗어나 눈으로 보는 것들을 그저 눈에만 담아 오고 싶은 맘이 들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도우루 강의 해가 지고 밤이 내리는 모습은 사진으로 남기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짊어지고 다니던 무거운 삼각대는 이제야 겨우 제 몫을 한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 풍경을 사진에 담았고, 모든 거리에 어둠이 내리면 포르투 지붕 색처럼 주황빛 불들이 들어왔다. 빛만 변한 게 아니었다. 공기는 차가워졌고, 강바람은 물기를 한껏 머금었다. 시간이 멈춘듯한 작은 도시의 골목들은 지도도 필요치 않았다. 돌아오는 길은 깊은 밤에도 안녕하고 평안했다.
  • 도우루 강

    Cais da Ribeira 47, 4050-511 Porto, 포르투갈

잠시 멈췄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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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도우루 강은 벌써부터 분주하다. 연인들은 사진 찍기 바쁘고, 혼자 온 여행자는 강의 먼 곳을 우두커니 응시하고 있다. 때마침 들어온 트램은 사람들을 내려주고 스르륵 지나간다. 강변 노천 카페에선 여행자들이 행복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가의 풍경을 바라보고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며 오래오래 볕을 맞았다. 100년이 넘은 성당, 100년이 넘은 서점, 100년이 넘은 카페가 있는 도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품고 흐르는 강. 오랜 시간 살아남은 낡고 귀한 것들이 가득 찬 이곳에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풍경이 좋았다. 그 멈춤이 좋았다.
저 강물의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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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하나를 손에 들고 강가를 걷는다. 이런 시간이 내겐 필요했다. 모든걸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만드는 시간이. 어릴 때는 여행을 시작하면 뭔가 큰 변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고, 여행을 마치고 나면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혹은 무한 성장한 나를 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리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우는 여행이 최고의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우루 강가에서의 나는 비로소 충분히 느리고 기꺼이 멈추는 여행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멋진 유적지, 화려한 관광지도 좋았지만 도우루 강가에 가기 위해 지나던 골목에서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 초록색 문 앞에서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던 남자, 이른 아침 찬 바닥에 앉아 성당을 스케치 하고 있던 소녀, 출근 하는 사람들에게 양말 꾸러미와 파자마 바지를 내밀던 행상 아주머니, 조심스레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묻는 내게 팔을 크게 벌리며 얼마든지 찍으라던 100년이 넘은 카페의 멋쟁이 지배인까지. 이들이 모여 여행의 기억을 이루고, 나의 포르투로 남는 것이다. 그때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꺼내 바라본다. 그 속에 여행이 활짝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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