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루트 빙중뤄, 고산의 마을로 [원난성, 중국]

조회수 16
중국 윈난의 여행기
이 이야기는 여행잡지 Artravel #13호에 게재된 여행작가 남궁인님의 여행기입니다. Artravel과 위시빈의 협업을 통해 지면에 모두 담지 못했던 사진과 방문했던 명소 정보들을 추가해 Artavel 매거진에 실렸던 특별한 여행이야기를 다시 발행합니다.
  • 운남성/ 윈난성

    중국 윈난성 추슝 이족 자치주 솽바이현

한번도 권한적 없는 길
  • 본문 이미지

방랑을 사랑한다. 방랑이란 언제까지 내가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시험하는 일이다. 그 진중하고도 반복되는 대화 안에서, 나는 새로운 세계와 또 다른 슬픔을 만들어내 돌아오곤 한다. 그래서, 이곳의 삶이 먹먹해져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생각될 때 방랑을 자처했다. 이곳에 붙박여 저곳을 갈망하는 나를 견딜 수 없었고, 늘 형언할 수 없는 고독이 온몸에 퍼져 있었다. '왜 이곳의 너를 버리지 못하는가. 너는 눈앞에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저곳의 네가 이곳의 너를 곱씹고, 되짚고, 또 짓밟아야 할 곳을 찾아내야 한다.'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고, 나는 불 꺼진 방에서 세계지도를 펼치고는 한 점을 가리킨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새로이 그곳에서 시작된다.
내가 짚은 지도 위의 한 점. 중국 대륙 변방의 윈난이었다. 10년 전, 스무 살 초반. 나는 한국에서 배를 타고 떠난 텐진에서 윈난까지 육로로 한 달 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인도로 넘어갈 예정이었지만, 무엇에 홀린 듯 비행기 대신 윈난에서부터 히치하이킹으로만 티베트 대륙을 관통해 인도로 들어갔다. 꼬박 한 달, 모든 것이 얼어붙었던 1월, 충분하지 못한 여비, 패딩 한장, 공안이 눈을 번뜩이고 있는 불법 여행-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 당시 나는 단지 태어났을 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었고, 십 년 만에 그 생각은 교묘하게 내 현재 처지와 겹쳤다. 쿤밍행 비행기에는 두 자리가 비어있었고, 나는 그 중 한자리를 예약했다.
  • 본문 이미지

게스트하우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아무도 오가지 않을 것 같은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내는 것도 오랜 여행에서 얻은 내 고유한 능력이다. 용도가 무엇인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다도기와, 여행 사진이 잔뜩 찍혀있는 벽 뒤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 물었다. "아무도 없는 곳이 필요해요. 십 년 전에 저는 이곳을 전부 횡단했습니다. 그리고 십 년 전의 윈난과 같으면서도, 제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곳이 필요해요."
내 십 년 전 이야기를 들은 게스트 하우스 주인은 이렇게 답했다. "말도 안 되는 루트군요. 당시 그걸 넘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그래요, 당신에겐 한 번도 추천하지 않아본 루트를 알려드리죠. 여기서 따리(大理)까지 갑니다. 거기서 류쿠(六庫)까지 가면 미얀마 국경지대인 노강(努江)을 따라 올라갈 수 있어요. 이미 해발 2,000m이고, 고도는 점점 높아집니다. 푸꿍(福贡), 꿍샨(贡山)을 지나면 빙중뤄(丙中洛)라는 마을이 하나 나와요. 이곳에 도착하면 티베트 경계에 이르므로 외국인은 더 북진할 수 없습니다. 여행이 합법적으로 허가된 마지막 마을이지요. 운남을 오래 여행한 사람도 좀처럼 가기힘든 곳이고, 아마 외국인이 닿은 기록 자체를 찾을 수 없을 겁니다. 한 도시를 이동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리니, 내일 출발해도 넉넉히 5일은 걸립니다. 돌아오려면, 길을 역으로 따라 나오는 것밖에 없어요. 일단 가기 위해서만 열흘이 걸리지요. 하지만, 그만큼 당신의 조건을 맞춰 줄 곳이라고 보이는군요." 나는 즉시 대답했다. "내가 거기 가 보지요. 나쁘지 않군요."
  • 본문 이미지

지도에서 빙중뤄로 가는 길은 너무 보잘것없는 실선이라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그 사이사이 몇 개의 주요 도시명이 간신히 표시되어 있었다. 이런 지도, 특히 중국 지도를 보면, 이 도시들의 이름들을 짓는 데만도 엄청난 세월이 걸렸으리라 장담할 수 있다. 실제 눈앞에서 보면 정말 보잘것없어서, 이곳의 이름을 짓는 데에 과연 그런 노력이 필요했을까 의문이 들 것 같은 마을들. 하지만 그곳을 관통하는 건 분명히 나에게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다음 날 출발했다. 십 년 전과 비교해 지나치게 북적거려 이질감이 한없이 느껴지는 따리를 스쳐 지나자, 그 다음 도시로 떠나는 정규 교통 편은 하루 한 대였다. 몇 명 타지도 않을 차표를 예약해가며, 해발 2,000m 위에서 흐르는 노강을 옆에 끼고 오르는 길을 따라서 중국과 미얀마의 국경을 횡단해갔다. 푸공, 꿍샨, 이런 곳에 왜 사람이 살고 있을까 의문이 드는, 번잡하고 황량한 도시들을 지났다. 결국 나는 5일 만에 빙중뤄에 도착했다. 곧, 춘절이었다.
마침내 끝의 마을
  • 본문 이미지

마을의 인구는 며칠만 눈여겨보면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고, 당연히 외국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매일 대로에 나가 살펴보면, 길을 지나는 그 사람이 또 그 사람이었다. 삼 일쯤 머무르자, 나도 누가 외지인이고 누가 이 마을의 주민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대로는 길이가 1km도 되지 않아, 온 마을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걸어도 이십 분이면 충분했다. 그 중간쯤에 마을 유일한 식당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밥을 먹는 사람이 없어 식사를 하려면 주인을 부르고 애걸해서 밥을 지어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 본문 이미지

조금 지나고 보니, 이 마을에는 음식을 사 먹는다는 개념 자체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많은 요리를 해서 그때그때 서로 나눠 먹고 있었다. 나도 한 끼를 얻어먹고 나서 이걸 깨닫고 고풍스러운 숙소 로비에서 끼니 때마다 밥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리 초대를 받아 온 사람처럼 편히, 눈 떠서 눈 감을 때까지 여기 머무는 여행자들과 모든 끼니를 겸상하며 지냈다. 오랜만에 숙소에 새로 누가 들어오면, 곧 겸상할 친구를 맞이하는 느낌이 들었다.
  • 본문 이미지

서늘해지면 산책을 했고, 가끔 티베트의 경계를 넘어 멀리가보기도 했다. 그 길에는 차마고도(茶馬高道)가 있었다.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사람들은 차와 말을 옮기기 위해 괴석을 뚫어 길을 내야만 했다. 눈과 마음을 의심케 할 만큼 압도적이지만 사진으로 찍으면 그냥 큰 산과 큰 강 일뿐이라,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고 그냥, '큰 산과 큰 강을 보고 왔노라' 말해야만 할 것 같은 길. 나는 그곳에 몸을 옮겨 놓고, 이 길에 삶을 풀어놓았던 숱한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은 험준한 비탈과 낭떠러지뿐이라도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옮겨 자신이 살아 있었음을 증명해야 했을 것이다.
해가 넘어가면 기원전의 사람들이 차와 말을 옮기며 쉬어 갔던 암흑천지가 펼쳐졌다. 숙소에서 두런거리기 위해 켜놓은 약간의 불빛은 마을 끝까지 뻗어나갔고, 우리가 소곤거리는 대화가 온 마을에 울릴 정도로 고요한 밤이다. 히말라야의 발원으로부터 티베트로 향하는 산자락과 노강이 전부 적막에 잠겨 있고, 우리 여행자들은 스물네 시간 꺼지지 않는 난롯가에 모여 서로에게 차와 술과 담배를 권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나는 내가 쓰던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는 그 이야기들이 좋았다. 그것은 흡사 다른 눈물짓는 나를 내어놓는 일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길의 끝에서 만난 적요 속에 서로의 이야기를, 또 꼬리를 물고 움트고 발화되어 각자의 입에서 나오는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다. 그것은 우리가 마침내 어딘가 끝까지 와버렸다는, 그곳이 인류 최고(最古)의 길 위일지라도 결국 지구의 한 귀퉁이 한 점에 앉아 난롯불을 쐬고 있을 뿐이라는, 그 외로움을 서로가 치밀하게 살갗으로 느끼고 있다는, 암묵적인 동조였다.
가깝고 까마득한 이편과 저편
  • 본문 이미지

중국에서 이미 몇 번 맞이했던 춘절은, 도시 사람들의 온 청력을 먹먹하게 만드는 폭죽 소리가 허공을 울리고, 온통 희뿌연 연기에 눈 앞에 캄캄해지는 날이었다. 이 세상 끝 마을에도 춘절은 찾아왔고, 사람들은 몇 개의 폭죽을 준비해 춘절을 맞이했다. 자정이 되자 간헐적으로 터지는 폭죽 소리는 히말라야의 산세를 타고 쩌렁거리며 울려 퍼졌다. 폭죽 소리가 조금 잠잠해지자 이내 고요와 적막은 예의 이 도시에서 차지하던 지위를 회복했다. 나는 새해의 복을 비는 '신니엔콰일러'라는 중국어를 몇 번 동료 여행자들에게 건네곤, 결국 침울한 나 자신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도 나는 혼자 하이킹을 나섰다. 새해에도 변함없는 티베트의 고산을 타다가 빙중뤄보다 더 작은 티벳탄 마을- 동펑(東風)에 닿았다. 세계의 변방에서도 더 변방에 있어, 현지 지도가 아니면 표시되지도 않는 마을. 산과 물을 몇 개 건너 찾아냈던 동펑마을의 진입로는 감동적이었다. 멀리 설산이 보이는 풍경을 꿰뚫고 앞으로는 광활히 뻗은 길에 가운데 소 한 무리가 뛰놀고 있는, 무엇인가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 같았다.
  • 본문 이미지

나는 긴 트레킹으로 목이 말랐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 만큼 허기가 져 있었다. 대로를 쭉 따라 마을에 진입했다. 막상 도달해보니 쓰러져가는 몇 가구뿐인 조금 초라한 마을. 얼마 안 되는 마을 사람들이 춘절 잔치의 여흥이 끝나지 않아 햇살 한가운데서 음식을 쌓아놓고 놀고 있었다. 난데없이 이방인이 나타나자 축제를 즐기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둘러 나를 상석에 앉히고 음식을 내어 놓는다. 나는 미소 지으며 이방인이 시골 마을 사람과 흔히 하는 한담을 나누었다. 자리에 술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감정 표현은 조금 과해 마치 무엇인가에 취한 듯 보였다. 내 앞에 놓인 누런 닭백숙 국물을 먹고서야 그 연유를 깨달았다. 백주(白酒)를 붓고, 거기다가 닭을 삶아 마시고 있었던 것! 난생 처음 먹어보는 엄청나게 독한 국물이라 눈앞이 핑핑 돌았다. 허기에 한 잔을 마시자 사람들이 이젠 아예 국물을 대접으로 내어놓는다. 나는 눈치채지 못하게 얼굴을 조금씩만 찌푸리며 국물을 홀짝거려 배를 채웠다.
  • 본문 이미지

상석 옆에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지독한 담배를 태우고 있었는데, 한 모금 만으로 삽시간에 아궁이를 뒤적거리는 것 같은 독한 연기가 내뿜어져 나왔다. 그녀가 내게 한 대를 권한다. 한 모금에 뒷골이 확 당겨오는데 그녀가 묻는다. 그곳에서도 우리와 같은 춘절을 쇠느냐고. 그래서 나는 우리도 당신네와 같은 춘절을 쇤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말했다. 너는 떠나왔던 길에서도 너무 멀리 있고 나는 평생 이곳을 떠난 적이 없지만, 춘절은 우리에게 같이 찾아왔으니 이것이야말로 경배를 붙일 일 아니냐고. 너와 내가, 같은 시간에, 복된 새해. 나는 대답했다. 당신은 이곳을 떠난 적 없으니 얼마나 안온한 새해이며, 나는 내가 나 자신을 떠나고 있으니 그야말로 또 얼마나 안온한 새해인 것이냐고. 대접에 담긴 닭 술 한 잔을 크게 떠서, 그녀에게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의미의 새해 문안과 덕담을 건네고 털어 넣었다.
  • 본문 이미지

살짝 취기가 올라 비틀거리며 산자락의 티베탄 사원에 오른다. 한국에 남겨놓고 온 내가 세상의 끝으로 옮겨 와, 우연같이 존재하는 산자락 마을에서 평생 떠나지 않았던 동펑마을 사람들과 하나가 된다는 것. 빙글거리던 히말라야 산길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 여행은 이것으로 충분해. 나는 설을 맞이한 내 자아들에게 전부 진정된 축복을 빌었으니까. 그러니 정말로 몸을 옮겨 어딘가로 가본,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결국, 나는 이 동펑마을에서야 비로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눈물짓는 나의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 본문 이미지

Comment Icon
댓글
0
프로필 썸네일 이미지
BESbsw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