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오브리가도, 라고스 [라고스,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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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스의 슬로시티 길을 걷다
이 이야기는 여행잡지 Artravel #37호에 게재된 여행작가 박준님의 여행기입니다. Artravel과 위시빈의 협업을 통해 지면에 모두 담지 못했던 사진과 방문했던 명소 정보들을 추가해 Artavel 매거진에 실렸던 특별한 여행이야기를 다시 발행합니다.
  • 포르투갈 라고스

    R. do Castelo dos Governadores 62, 8600-315 Lagos, 포르투갈

고향(故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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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故) 있는 곳(鄕)을 '고향'이라 하고 타향이라도 오래 살면 고향이라 말한다. 하지만 어느 곳에선 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안착하지 못하고, 어느 곳에선 겨우 한 달여를 머물러도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긴다. 일상(日常)은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아닌가? 그런데 고작 타박타박 산책하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가고, 스쿠터를 타는 일상이 장엄할 수 있을까? 어느 곳에선 그렇다.
당신에게 바다를 그리라 하면 어떻게 그릴까? 수평선을 긋고 하얀 구름을 그리고, 바다는 파랗게 칠하려나? 당신이 생각하는 겨울은 추울 것이다. 하지만 포르투갈 어느 곳의 겨울은 봄처럼 따뜻하고, 그곳의 바다, 북대서양을 바라보는 일상은 장엄하고 엄숙하다. 그곳에 머물 때부터 이미 그립기 시작한 곳, 유럽 대륙의 서쪽 끝에 고향 같은 곳이 생겼다.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그곳의 이름은 라고스(Lag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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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스에서 보낸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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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스는 포르투갈 남부의 작은 도시다. 여기 오기 전 일주일간 리스본에 머물 때만 해도 이름조차 몰랐던 곳이다. 일주일 내내 비가 내릴 거란 일기예보 때문에 포르투갈 북부의 포르토로 가는 대신 남부로 발걸음을 돌리다 눈에 띈 곳이 라고스다. 말 그대로 어쩌다 라고스다.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고 포르투갈뿐 아니라 유럽 대륙의 서쪽 끄트머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 라고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세비야와 바르셀로나, 이스탄불을 거쳐 트빌리시로 넘어가면 되겠군, 하고 생각했다. 이 때만 해도 포르투갈을 떠나면 터키와 조지아를 둘러보는 분주한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여정은 라고스에서 느닷없이 멈춰버렸다. 라고스의 숙소를 예약할 때만 해도 상상조차 못한 일이다. 사실 애초 목적지는 라고스도 아니었다. 지도에서 포르투갈 남부의 작은 도시를 훑어보다 스페인 국경에 접한 '파로'로 가려던 참이었다. 어차피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하니 장거리 버스를 10시간 넘게 타는 대신 단어만으로 특별한 '국경도시'에서 하룻밤 쉬다 가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지도를 보니 라고스는 바다와 바로 접해 있고, 파로는 좀 떨어졌다. 눈 깜짝할 새 행선지는 라고스로 바뀌었다. 태평양이나 대서양이나 뭐, 바다가 바다지, 얼마나 다를까 싶었지만 포르투갈 남부의 바다를 잠깐이라도 보고 싶었다. '대서양(The Atlantic Ocean)'이란 이국적인 이름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너머에 북아메리카 대륙을 품은, 역시나 특별한 바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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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늦은 밤 라고스에 도착해 숙소까지 15분 정도 고요한 골목길을 걸었다. 집주인 말리(Marli)는 스튜디오 테라스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반갑게 인사했다. 이방인을 맞는 그녀의 환한 미소만으로 숙소를 잘 구했다고 생각했다. 라고스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 빠드리아 센트라우

    R. Primeiro de Maio 23, 8600-315 Lagos, 포르투갈

빠드리아 센트라우(Padaria Cent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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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드리아 센트라우(Padaria Central).
다음날 아침잠을 깨자마자 찾아간 빵집이다. 말리가 추천한 빵집이다. 에스프레소가 60센트쯤 했던가? 언뜻 기억을 더듬어 봐도 유럽에서 60센트짜리 에스프레소를 마시긴 처음이다. 물가가 아주 저렴하다고 하는 베를린에서도 60센트짜리 에스프레소를 본 적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커피를 마시는 나로선 신날 수밖에 없다. 아침에도, 오후에도 6-700원짜리 에스프레소를 홀짝거리며 사람들을 구경한다. 동네 사람이 많지만, 관광객도 적잖다. 사진은 별반 찍지 않았다. 이른 아침 동네빵집에 앉아 슬쩍슬쩍 셔터를 누르며 사람들 눈치를 보기는 그랬으니까. 나중에 말리 얘기를 듣고 알았다. '빠드리아'는 빵집, '센뜨라우'는 중심가라는 말이니 '빠드리아 센트라우'는 '중앙가 빵집'이란 뜻이다. 실제로 라고스 구시가지 중심가에 있었다. 그러고 보면 참, 정직한 이름 아닌가! 커피를 마시고, 골목을 걷고, 요트들이 늘어선 바닷가를 천천히 걷다 보니 금방 하루가 지나버렸다. 고작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떠나려 하니 왠지 아쉬움이 남아 이틀만 더 지내기로 했다. 말리의 스튜디오에는 벌써 다른 예약이 차 숙소를 옮겨야 했다. 아이씨, 진작 연장할 걸. 배낭을 메고 오르막길을 터덜터덜 오르니 금세 등에서 땀이 흐른다.
  • 스페르유레카

    Rua Santa Casa da Misericórdia de Lagos L17A, 8600-621 Lagos,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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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발견한 두 번째 숙소는 말리네 스튜디오보다 훨씬 큰 원 베드룸 아파트(One-Bedroom Apartment)다. 방과 거실이 널찍한데다, 큰 테이블과 소파까지 있다. 달랑 침대 하나 놓여 있는 숙소를 전전하다 보니 방에 큼직한 테이블이 있다는 것만으로 감개무량하다. 주인 티아고(Tiago)를 만나 체크인 하는 자리에서 바로 하루를 더 연장했고, 그 날 밤 다시 "이틀을 더 지내고 싶다."고 메시지를 신속하게 보냈다. 머뭇거리는 사이 말리네 스튜디오처럼 다른 예약이 들어올까 다급해진 탓이다. 느닷없이 라고스에서 하루 아닌 닷새를 묵기로 했는데 이마저 끝이 아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티아고에게 "나흘을 더 머물 수 있겠냐?"고 물었다. 집이 좋았고, 티아고가 친절했다 해도 그것만으로 연장의 연장을 거듭한 이유를 다 설명할 순 없다. 그 때 나는 무엇엔가 홀려 있었다. 단지 하루 이틀 라고스를 거닐었을 뿐인데 터키나 조지아에 가지 않고 여기 머물러야겠다고 순식간에 마음을 바꿔 먹은 건, 라고스에서 뭔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라고스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내가 아는 포르투갈어는 '오브리가도(감사합니다.)'가 전부인데도 나는 그저 이곳이 편안했다. 마치 그리운 고향에라도 돌아온 듯.
더구나 그 때까지 몰랐다. 티아고의 아파트에선 하우스키퍼가 이틀에 한번씩 청소를 해주고, 심지어 세탁 서비스까지 제공한다는 걸. 지금도 좀 의문이다. 성수기는 아니란 걸 감안해도 티아고는 왜 그렇게 저렴한 가격으로 호의를 베풀었는지.체크인을 할 때 티아고가 중요한 얘기를 한 가지 해주었다.
"참, 저쪽 코너에 스페르유레카(SuperEureka)라는 슈퍼마켓이 있는데 매일 아침 갓 구운 빵을 팔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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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만 해도 솔직히, '슈퍼마켓 빵이 얼마나 맛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다음 날 별 기대 없이 '슈퍼 빵'을 손에 쥐었을 때,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다. 따뜻하다. 빵에 온기가 있다. 딱딱한 듯 보여도 부드럽게 달걀 깨지듯 쪼개진다. 겉은 바삭한데 속은 촉촉하다. 티아고 말대로 갓 구운 빵인데 가격마저 저렴하다. 까세찡요빵(Cacetinho), 아구아빵(Agua), 빌라빵(Vila), 그리고 우리가 '에그 타르트'라 부르는 파쉬테오 드 나따(Pastel de Nata)와 초콜릿 크루아상 다섯 개에 단돈 2.24유로다. 이만하면 풍요로운 아침 아닌가! 포르투갈 빵은, 놀랍게도, 파리나 독일 빵보다 더 맛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매일 아침 이렇게 맛있는 빵을 먹는구나. 아침에 빵 먹기 좋아하는 나로선 따뜻하고 촉촉한 빵을 매일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라고스가 천국 같다. 슈퍼의 빵 코너에서 포르투갈 사람들이 매일 밥처럼 먹는 빵은 한 개에 24센트에서 30센트, 좀 비싼(?) 빵은 70센트에서 75센트 정도다. '빵(pão)'이 다름 아닌 포르투갈 말이라는 건 '빵의 지존'이 이곳 포르투갈이란 말이다. 아침이면 세수도 않고 슈퍼마켓이건 동네 빵집, 빠다리아건 빵 사러 가는 건 언제나 즐겁다. 라고스를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었다. 빵 먹느라고...
결국 연장하고 또 연장하는 식으로 2주 넘게 티아고의 아파트에서 지냈다. 처음 며칠만 쓸 텐데... 하고 샀던 250ml 올리브 오일은 진작 다 쓰고 한 병을 더 샀는데 그마저 1/4 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서 산 88g짜리 히말라야 소금도 거의 다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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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스에서 처음 마트에 갔을 때는 쌀 종류만 수십 가지가 있는 걸 보고, 여기가 포르투갈이야, 한국이야? 하고 깜짝 놀랐었다. 매일 저녁 마트에서 장을 보고 이 쌀, 저 쌀로 밥을 하다 보니 그 중에서도 '카로니노쌀'이 한국 쌀과 가장 비슷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저녁은 대개 한식을 만들어 먹었고, 아침이나 점심은 샌드위치나 포르투갈식 백반을 먹었다. 대구 요리에 쌀밥이 곁들여지는 식이라 할까? 즉석에서 잘라주는 생햄, 생하몽 그리고 모차렐라 치즈도 라고스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즐거움이다. 한낮에 집에서 포르투갈 소시지(우리식으로 말하면 순대) 쇼리수(Chourico)를 넣고 파스타를 만들면 여기가 꼭 내 집 같았다.
  • 포르투갈 라고스

    R. do Castelo dos Governadores 62, 8600-315 Lagos, 포르투갈

한낮의 태양을 받으면 라고스는 영락없는 휴양지다. 실제로 '유럽의 겨울 휴양지'로 유명하다. 한겨울에도 남유럽의 햇볕은 유난히 밝고 선명하다. 차라리 겨울이라 다행이다. 지금이 한 여름이라면 얼마나 많은 관광객이 바글댔을까? 파두를 연상하며 떠올리는 우울하고 쓸쓸한 포르투갈의 정취 같은 건 라고스에선 찾아볼 수 없다. 큼직한 거실과 주방을 가진 아파트가 있고, 바다가 있고, 동네 빵집, 카페가 있고, 게다가 대형 마트도 있으니 부족할 게 없다. 여기에다 렌트한 바이크가 있어 어디든 갈 수 있다. 아침이면 빵집에 가 동네 사람들 사이에 끼어 포르투갈 스타일의 토스트를 먹고, 낮에는 바이크로 라고스 근교를 누비고, 저녁에는 대형마트에서 장을 봤다. 일과는 단순하지만 풍요롭다. 여행을 하며 이런 말을 하기란 쉽지 않지만, 부족한 게 없다,고 하려고 보니 아, 안 좋은 점도 있었다. 집의 히터가 변변찮았다. 낮에는 여름처럼 햇볕이 쨍쨍한데 밤에는 추웠다. 아침이면 온몸이 찌뿌둥하다. 창밖의 새하얀 햇살은 집 밖에만 머무른다. 포르투갈에서 북향집의 위력을 깨달았다. 아침에 눈만 뜨면 탈출이라도 하듯 밖으로 뛰쳐나갔다. 집안에서 벌벌 떨다가도 집만 나서면 오 마이 갓! 탄성이 터질 만큼 따뜻한 햇살이 온몸을 어루만졌다. 정말 눈 깜짝할 새 기분이 달라지곤 했다. 해만 뜨면 모든 게 아름답고 따뜻하다. 라고스의 집들은 대개 하얗거나 푸르거나 샌디 브라운(Sandy Brown) 색이다. 한 마디로 해만 뜨면 예쁘고 화사한 휴양지로 뽐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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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집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니 직원이 "본 디아(Bom Dia)-!" 하고 인사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라는 말이다. 포르투갈의 카페에서 흔한 메뉴인 '우유가 들어간 커피(Coffee with milk)'를 시키니 우유 거품 위에 'Bom Dia'라고 쓴 커피를 갖다 준다. 전 같았으면 좀 유치하군, 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왠지 이 나라와는 잘 어울리는 장식이다. 사람들이 유순한 걸까? 라고스에서는 그저 편안하다. 포르투갈 여권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
  • 사그레스 요새

    Unnamed Road, 8650 Sagres, 포르투갈

매일 북대서양을 보러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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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스, 그 작은 동네에서 16일 동안이나 뭘 했어요?"
누군가 물었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매일 바다를 봤어요.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그랬다. 바다를 보는 건 중요한 일과여서 하루도 빼먹을 수 없었다. 이번엔 당신이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르겠다. 영문을 알 수 없을 당신에게 한 마디 더해볼까? 바다에 볼 게 너무 많았다고요. 내가 빵을 아주 좋아한다고 했지만 라고스에서 빵만 먹은 건 아니라고요. 그렇다. 나는 라고스에서 매일 바다를 보았다. 라고스에 오기 전까지 내가 알고 있던 바다와는 전혀 다른 바다였다. 대개는 바이크를 타고, 드물게는 걸어서 바다를 보러갔다. 라고스의 바다는 예사 바다가 아니다. 동네산책이라 해도 대서양을 향해 탁 트인 벼랑을 따라 걸으니 마치 머나먼 곳에서 하이킹이라도 하는 것 같다. 머나먼 곳이란 게 틀린 말도 아니다. 나는 여기서 10,550km 떨어진 극동에서 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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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일몰 직전 바다를 향해 무작정 걸었다. 역시나 바다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멀리서 보면 평온하지만 다가갈수록 그 모습은 뒤바뀐다. 어느 새 눈앞이 아닌 발밑으로 바다가 펼쳐진다. 파도의 하얀 포말이 쓰나미처럼 보일만큼 거대하다. 물거품 너머 붉은 해가 서서히 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이 바다는 해가 사라진 후에도 매순간 형색을 달리한다. 말로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처음에는 어안이 막혔고 그 다음에는 아름다웠다. 뭔가 세상 끝의 풍광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라고스를 여행하기 전에는 바다가, 파도가 이렇게 여러 감정을 전하는지 몰랐다. 대개는 미동도 하지 않을 거라 여긴 바다가 내 심장을 방방이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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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 아니다. 라고스를 좀 벗어나 인적 드문 곳에 다다르면 바다는 더욱 극적으로 변신한다. 바이크를 타고 찾아간 사그레스(Sagres)나 알제쥬(Aljezur)의 바다는 더욱 장엄했다. 라고스에서 4-50km 떨어진 곳이지만 4-50km가 아니라 4-5,000km를 달려온 것 같다. 바다가 바다 아닌 은빛 평원 같다. 바다를 내내 바라보고 싶지만 종종 눈을 뜰 수가 없다. 벼랑 끝에 겨우 선 점 같은 인간이 마주한 바다는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생물체다. 수백 미터의 파도가 가지런히 밀려올 때마다 지구가 넘실거리고, 지구가 빛나는 것 같다.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봐도 좋겠는데 바다는 결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바다는 사납고 부드러우며, 때로 완만하고 격하다. 밀려오는 동시에 밀려간다. 지구가 보여주는 거대하고 장엄한 쇼다.너무 예쁘고, 너무 무섭다. 바다는 남극 같고 설원 같으며, 거대한 평원 같다. 바다는 나를 뒷걸음치게 한다. 나를 소리 지르게 한다. 나를 울컥하게 한다.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이건 바다가 아니다. 수평선을 가득 채울 만큼 장중하게 밀려드는 파도는 파도가 아니다. 공경하지만 두려운 존재다. 위대한 자연을 목도하는 경외감에 젖게 한다. 지구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바다가 아니라 내가 사는 별, 지구의 모습이다. 한번 이 바다를 보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그리워할, 누구라도 위로 받을 바다다. 사는 게 힘들 때 그곳을 떠올려 위로 받을 곳을 고향이라 한다면 바로 이 바다가 내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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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이아산, 몬시크 산

    8C66+8J Monchique, 포르투갈

꿈의 라이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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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라고스, 그 작은 동네에서 16일 동안이나 뭘 했어요?" 하는 질문에 매일 바다를 보았다고 썼다. 여기에 꼭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바이크를 타고 바다를 봤어요. 그렇다. 나는 매일 바이크를 타고 바다에 가서 바다를 보았고, 산꼭대기에 올라서도 바다를 보았다. 바이크 타기는 포르투갈에서 내내 벼르던 일이었다.
라고스 이틀째, 바이크 샵에 갔더니 1시가 좀 넘었는데 문이 닫혔다. 무슨 영문인가 싶었는데 1시부터 자그마치 3시까지 점심시간이란다. 바이크 샵이 여기만 있는 게 아니지! 하고 옆에 있는 샵을 가봐도 마찬가지다. 결국 두 시간을 기다려 야마하 Xmax 400이란 바이크를 빌렸는데 음, 시트고가 생각보다 높다. 400cc 바이크는 처음 타보는데 시트도 높고, 211kg이란 바이크 중량도 만만치 않아 처음에는 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더 이상 편할 수가 없다. 당기는 대로 잘 나갈 뿐 아니라 장거리를 달려도 전혀 무리가 없다. 한 가지, 멈출 때마다 까치발로 간당간당한 게 좀 불안했지만 조금씩 익숙해졌고 어느 새 포르투갈 남부의 낯선 도로를 달리는 게 즐겁기만 하다.
바이크를 타고 달리기 시작하면 어디로 달리든 상관없이 환호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내가 라고스에서 장엄한 바다를 매일 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바이크 덕분이다. 도무지 쓰고 싶지 않은 후줄근한 시스템 헬멧에, 장갑도 없는 게 아쉽긴 했지만 나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매일 아침 눈만 뜨면 바이크를 타고 때로는 국도로, 때로는 고속도로를 달려 바다를 보러 갔다. 그렇다. 유럽에선 바이크로 고속도로를 탈 수 있다. 한국에서 바이크를 타는 이라면 가장 부러워할 대목이다. OECD 국가 중 오직 한 나라, 우리나라만 바이크의 고속도로 진입을 금지한다. 50cc 스쿠터이건 1억짜리 슈퍼바이크이건 한국에선 국도를 맴돌 뿐이다. 나 또한 그랬다. 나 또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꿈을 진작부터 품고 있었다. 한국에서 베스파를 타기 시작하면서 품은 꿈대로 포르투갈의 A22 고속도로를 달려 포르투갈 남부의 끝, 유럽 대륙의 끝인 사그레스(Sagres)를 거쳐 까프 세인트 빈센트(Cape Saint-Vincent)로 향한다. 대서양을 건너 북미로 가지 않는 한 더 이상 달릴 곳이 없다. 그야말로 끝이다. 그 때 사그레스의 바다는 세상 끝에 있는 바다 같다. 세상 끝의 바다를 마주하고 벼랑 위에 선다. 발밑은 낭떠러지다. 숨이 탁 막힌다. 파도 아닌 바다 전체가 육지 아래에서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무섭다. 나도 모르는 새 뒷걸음질 친다. 어느새 낯선 세상에 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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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바이크를 타고 산을 향해 달린다. 목적지는 해발고도 902m의 몬시크 산(Monchique Mountains)이다. 40여km, 대략 한 시간 거리다. 바이크 샵 직원은 몬시크 산을 라고스 최고의 라이딩 코스로 꼽았다. 그에게 북대서양 바다는 나와 달리 너무 익숙한지도 모르겠다. 딱 기분 좋을 만큼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한적한 도로를 유유히 달려간다. 바이크가 아니면 보지 못할 포르투갈 남부의 시골을 구경한다. 산간도로를 온몸으로 비행하듯 유영한다. 이 길을 달리는 게 기적처럼 여겨진다. 전생에 어떤 인연이라도 있지 않고선 가능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몬시크 산 정상에서 본 노을은 장대하게 아름다웠다. 저리도 새빨간 노을은 처음 본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은 힘들었다. 하루 동안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곳이 라고스다. 한낮에는 여름 같지만 해만 지면 공기는 소스라치게 돌변한다. 게다가 길을 잃어 엉뚱한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스로틀을 당기면 다다다다다- 엄청난 바람 소리, 엔진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헬멧을 쓴 얼굴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휙휙 돌아간다. 바람이 내 몸을 스쳐 지나는 게 아니라 완력으로 화악 밀어 붙이는 형국이다. 미들급 바이크가 아니면 종잇장처럼 바람에 휩쓸려 갓길로 밀려 났을지도 모르겠다. 깜깜한 고속도로를 얼마나 달렸을까. 간신히 125번 국도로 빠져 나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좀 무섭기도 했지만 잊지 못할 라이딩이다. 추워 벌벌 떨면서도 달리다 종종 소리 지른다. 너무 좋다고. 누군가 이런 꼴을 보면 미친놈이라 할 형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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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스에서 바이크가 없었으면 나 또한 대개의 관광객처럼 라고스 중심가나 인근의 비치를 둘러보고 배를 타고, 동굴을 둘러보는 투어를 하고 "라고스는 끝!"이라 여겼을 것이다. 다행히 바이크를 탈 수 있어 매일 제각각 다른 대서양의 끝을 둘러보았다. 라이딩 목적지가 한강도 아니고 서해안도 아니고 대서양이란 사실만으로 가슴이 뻐근했는데 유럽의 끝, 육지의 끝에서 마주한 북대서양은 전에 한번도 보지 못한 바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도만 보고 무작정 찾아온 라고스에서 바이크를 타고 북대서양 바다와 포르투갈 남부 산간지대를 달리며 위대한 자연과 마주했다. 포르투갈에서 받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선물이다.
  • 폰타 다 피에다데

    EM536, 8600 Lagos,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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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2주 넘는 시간이 지났다. 이름도 몰랐던 곳으로 무작정 찾아와 겨우 16일을 지냈을 뿐인데 유럽연합, 포르투갈, 라고스 세 개의 깃발이 휘날리는 아파트 107호는 어느새 내가 늘 살았던 듯 집인양 익숙해졌다. 하지만 어느새 떠날 날이 하루 이틀 다가왔다.
라고스를 떠나기 전날, 바깔라우(대구 요리)로 포르투갈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마치고, 토트백에 물통 하나 넣고, 집에서 1.8km 정도 떨어진 해변의 낭떠러지, 삐롤 다 뽄타 다 삐에 다드(Farol da Ponta da Piedade)로 산책을 갔다. 라고스에 사니 험하게 높이 솟은 낭떠러지 산책이 일상이다. 하늘과 바다를 분간하지 못할 만큼 흐리다. 가만히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몰아치고 비까지 떨어진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꼭 다시 한번 보고 싶었던 바다다. 거센 물결이 몰아치는데, 늘 보았던 새빨간 노을도 없는데 내 마음은 아늑하게 평안해진다. 무작정 고마웠다. 난 '행복'이란 말을 잘 안 쓰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여기 머물 수 있어 행복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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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에서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지금은 입에 딱 붙는 말이다.
무이또 오브리가도(Muito Obrigado), 라고스...정말 고마웠어요, 라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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