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죽은 자들이여 [과나후아토, 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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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만의 축제, 망자의 날 (Dia de los Muertos)
이 이야기는 여행잡지 Artravel #07호에 게재된 정민아·오재철님의 여행기입니다. Artravel과 위시빈의 협업을 통해 여행잡지에 모두 담지 못했던 사진들을 추가하고 디지털의 정보로 방문했던 명소들을 기록하여 독자분들에게 입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 과나후아토

    28 de Septiembre 109B, Zona Centro, 36000 Guanajuato, Gto., 멕시코

죽은 자 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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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는 축제는 여행자에게 커다란 선물과도 같다. 축제가 그 지역에서만 열리는 특별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할 터. 우리는 과나후아토에서 '망자의 날(Dia de los Muertos)'이라는 가장 멕시코 다운, 멕시코만의 축제를 만났다. 멕시코에서는 따로 제사가 없는 대신 1년에 한 번 날짜를 정해 온 국민이 다 함께 죽은 자를 위로하는 축제를 벌인다. 죽은 자들은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이승으로 찾아오고, 산 자는 분장을 하고 죽은 자를 맞이한다.
She said - 죽은 자를 위한 꽃의 축제 (정민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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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0월 말, 밤 9시가 넘어서야 과나후아토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에서야 이 시간이면 친구들을 만나 한창 분위기 무르익게 놀고 있을 초저녁이지만 지구 반대편에 떨궈진 동양인 두 명에게 밤 9시는 언제 어디에서 위험이 튀어나올지 모를 두려움의 시간. 골목 여기저기 희끗희끗한 무언가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듯도 하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어두컴컴한 과나후아토의 밤거리를 부리나케 지나 예약해 놓은 호스텔로 쑥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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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호스텔 주인이 깨기도 전인 이른 새벽녘... 발코니에서 바라본 과나후아토의 전경은 지난밤의 두려움을 무색하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형형색색 과나후아토의 집들은 이름 모를 꽃들을 한데 모아 놓은 듯 촘촘하게 피어 있었고, 미로같이 펼쳐진 골목들은 꽃의 줄기처럼 무성하게 엉클어져 있었다. 과나후아토의 집들은 똑같은 색이 단 하나도 없다. 같은 노란색이라 할지라도 칠한 지 얼마 안 된 집은 샛노랗고 오래된 집은 빛바랜 연노랑이다. 그렇기에 과나후아토의 골목골목은 한 모퉁이를 돌 때마다 늘 새로웠다. 꽃처럼 아름다운 과나후아토에 어둠이 내리자 중세 시대 복장을 한 마리아치들이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을 하나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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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경쾌한 멕시칸 음악을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들썩.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자 마리아치들 이 구경하던 사람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한다. 마리아치의 뒤로 수많은 사람이 뭔가에 홀린 듯 졸졸 움직인다.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의 한 장면 같다. 행렬은 1시간이 넘게 계속된다. 이토록 아름답고 로맨틱한 과나후아토의 밤을 의심한 죄 달게 받으리라. 마리아치를 따라 아름다운 과나후아토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때로는 우렁찬 멕시칸 음악을, 때로는 사랑스러운 세레나데 연주를 듣고 있노라니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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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밤은 우연히 마주치게 된 '망자의 날' 밤이라 할 수 있겠다. 과나후아토 대학의 메인 계단 위에 수백 개의 촛불과 전통 음식으로 구성된 거 대한 제단이 차려지고 전교생이 검정 옷을 입은 해골로 변신한다! 총장님의 주도로 때론 진지하게, 때론 익살스럽게 죽은 자들을 부르고, 그들을 위한 의식이 진행됐다. 우리나라 같으면 몇몇 학생만 주도하고 나머지는 그저 빙 둘러서서 구경만 했을 것 같은데 정열의 멕시코 사람들은 학생, 주민, 여행객 할 것 없이 각자의 손에 촛불 하나씩을 들고 제단 주위에 빼곡하게 서서 축제의 의식에 참여했다. 나 또한 그 틈에 끼어 있었고. 해골 혹은 영혼을 부르는 것을 금기하고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나라에서 살아온 나는, 태어나 처음 경험해 보는 이색 체험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마저도 사랑한 그들의 축제 속에서 오히려 '삶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었기에.
He said - 이승으로 떠나다 (오재철 작가)
매번 제삿날이 가까워지면 우리 부자의 언성은 늘 높아졌다. 무엇보다 실리와 효율을 중요시하는 내게 아버지는 조상을 잘 모셔야 우리 세대가 잘 살고, 또 후대가 편하다 이르시며 예와 격식을 차리고 온 정성을 다하여 제사상 차리기를 강요하셨다. 문제는 그렇게 차려야 하는 제사가 일 년에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거. 난 제사가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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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나후아토에 대한 정보라고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것뿐이었는데, 도착하자마자 호스텔 주인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뉴스를 들었다. 3일 후인 11월 1일과 2일 이 망자의 날, 즉 죽은 자들을 위한 날이라는 사실. 어쩐지 거리의 달뜬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제사상에 대한 안 좋은 선입견이 '죽은 자들의 의식 따위'라며 거부하였기에 이내 행사에 기울어지는 관심을 거두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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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의 아침이 밝았다. 죽은 자를 기리는 일은 엄숙하고 정갈해야 한다는 나의 편견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하늘은 더없이 맑고 파랬다. 조용하고 차분할 줄 알았던 도시는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썩였다. 익살스러운 해골 분장을 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가게마다 색색이 해골 사탕과 설탕 과자, 그리고 망자의 빵을 팔고 있었다. 마을 광장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도로에는 경적을 울려대던 차들 대신 나팔과 북소리가 가득한 행진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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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서는 슬프거나 숙연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동안 보지 못했던 가족들을 만난다는 설렘을 안고 모두들 환한 표정으로 죽은 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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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스 광장을 중심으로 우니온 정원까지 이어지는 긴 골목 바닥엔 망자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주재료는 화려한 색의 꽃들과 물감으로 물을 들인 콩, 밀, 옥수수, 겨 등의 곡물이었다. 1m 간격으로 이어진 이 길거리 전시는 장관을 이뤘고, 한 작품 한 작품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색색이 아름다운 과나후아토의 집만큼이나 그들의 축제는 아름다웠고 빛이 났다. 이들에게 망자의 날은 죽은 자들을 애도하는 '슬픔'이기보단 죽음으로 인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랑하는 가족들과 만나는 '상봉'을 의미하는 날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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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조상을 섬기는 제사 자체가 싫었던 게 아니라 형식에 치중하는 듯한 제사 문화가 싫었던 건지 모르겠다. 영혼이나 귀신의 존재를 완전히 믿는 편은 아니지만 일 년에 한 번쯤 온 국민이 한데 마음을 모아 죽은 자들을 기리면 그 마음이 붉은 꽃을 타고 하늘에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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