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무인도 여행자 [팔라완, 필리핀]

조회수 93
팔라완 무인도 여행기
이 이야기는 여행잡지 Artravel #05호에 게재된 여행작가 윤승철님의 여행기입니다. Artravel과 위시빈의 협업을 통해 지면에 모두 담지 못했던 사진과 방문했던 명소 정보들을 추가해 Artavel 매거진에 실렸던 특별한 여행이야기를 다시 발행합니다.
  • 팔라완

    Palawan, Philippines

  • 본문 이미지

조용한 섬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무인도라면 가능할까요. 바다와 바위와 나무, 그리고 하늘이 전부일 것 같은 곳 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 다짐하고 방문을 걸어 잠근 것과는 분명 다른 느낌일 것입니다. 그 어떤 연락도 받지 않겠다 마음먹고 휴대폰의 전원을 꾹 눌러 꺼버리는 것과도 다른 느낌일 것입니다. 자연스레 세상 모든 것과 멀어지는 곳이라면 말입니다.
  • 본문 이미지

한번은 동생과 부루마블을 한 적 있습니다. 몇 바퀴 짼 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 없이 주사위를 던지니 어느덧 땅에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습니다. 처음에 걸렸을 때 서로 나오려고 발버둥 쳤던 무인도가 그제야 보였습니다. 반대로 은근히 가고 싶어진 것이죠. 세 턴을 쉬는 것이 그렇게 뒤처지는 것처럼 보이더니, 이제는 쉬고 싶었습니다.
  • 본문 이미지

주사위를 던지며 출발선을 몇 번이나 돌고, 열심히 땅을 사들였던 것을 생각하니 참 제가 사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신없이 쳇바퀴의 일상을 살아가며 누군가의 땅을 뺏고 뺏기는 것이요. 정말 우리의 삶에 쳇바퀴의 일상이 아닌, 경쟁이 일어나지 않는 공간은 없는 걸까요. 우리 삶에 무인도란 세상은 존재할까요.
무인도가 가슴에 가득 찼다
  • 본문 이미지

무인도에 가면 누군가가 편지를 넣고 코르크 마개로 닫은 빈 병도 하나 떠내려와 있을 것이고 사람은 없지만 나무로 만든 편지함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무수히 많은 별과 시원한 파도소리를 해변에서 원없이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이 되는 곳, 그곳에 가면 무엇이든 새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을 거란 생각도 했습니다.
정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무인도가 있을까. 있다면 갈 수 있을까. 어떻게 가는 것일까. 알고 보니 우리나라에만 섬이 4천 5백여 개가 있더군요. 예전엔 사람이 살았다가 지금 살지 않는 섬까지 무인도로 포함하면 그 중 4천여 개가 무인도입니다.
  • 본문 이미지

곧장 섬이 많은 서해로 달려가 어부 아저씨께 부탁 드렸습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섬에 내려달라고요. 한참을 웃으시더니 걱정 반 진담 반으로 진짜냐고 되물으십니다. 며칠 뒤 약속된 날에 데리러 오시겠다는 말을 듣기까지 한참이 걸렸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이때 쫓겨났습니다. 제가 피운 모닥불을 보고 해경이 출동했기 때문입니다. 옆 섬에 사는 사람이 신고했는데요,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제가 주인이 있는 섬에 무단침입을 했고, 주인에게 허락을 받더라도 무인도의 나무를 베거나 꺾는 것은 산림법에 위반된다는 것을요. 물론, 간첩의 오해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들은 이야기인데 섬으로 간첩이 들어와 섬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킨 적도 있다고 하더군요.
구글 위성지도를 켰습니다. 합법적으로 무인도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없을까. 정말 영화에서처럼 주인공이 조난당했을 때 나오는 무인도는 없을까. 지도를 확대해 전 세계 섬들을 둘러보니 필리핀 팔라완 인근의 무인도가 제가 생각한 무인도와 가장 가까웠습니다. 국내 무인도에 달려갔던 것처럼 곧장 팔라완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무작정 간 팔라완의 해변에서 수소문한 끝에 무인도를 가진 섬 주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3주간의 무인도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아주 간절한 코코넛
  • 본문 이미지

막상 무인도에 도착하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도시에서 자란 저는 이렇게 자연 한가운데 있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 타고 왔던 배를 타고 다시 바다로 나갔습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먼 곳에서 배를 타고 다시 한 번 섬을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마치 인생을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라는 말처럼 먼 곳에서 제가 살아갈 곳을 봤습니다. 그제야 어디에 야자수가 있고, 어디에 나무가 많으며 어디쯤의 파도가 잔잔한지도 알게 됐습니다.
  • 본문 이미지

다음으로 한 일은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첫 일주일간은 하루 세끼는 고사하고 한 끼도 제대로 먹은 적이 없었습니다. 바닷속에는 물고기가 많았지만 이렇게 빠른 녀석들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랐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위에 붙어 있는 고동들을 삶아 먹거나 새벽이면 해변으로 나와 기어다니는 게나 조개 혹은 야자수 나무에 열려 있는 코코넛을 따먹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 본문 이미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코코넛 나무에 올라갈 때도 사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보기엔 분명 높아 보이지 않는 저 나무를 오르는 데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목이 말라 코코넛을 따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처음 나무를 올랐을 땐 절반밖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생각보다 아주 높았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훨씬 더 목이 말라졌을 때 다시 나무에 올라가 봤습니다. 무서워서 끝까지 오르진 못했지만 그래도 전보단 많이 올라갔습니다. 이윽고 목이 말라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다시 한 번 올라가 봤습니다. 한 켠에선 물을 증류하고 있었지만 한 방울씩 떨어지는 증류수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간절함 때문인지 이번엔 끝까지 올라가 코코넛을 땄습니다. 이런 것이 간절함의 힘인가 봅니다.
  • 본문 이미지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코코넛을 땄다는 기쁨도 잠시, 내려오는 것이 무서워 한참을 혼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인생이 이런 걸까요. 오를 줄만 알았지 정작 내려와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결국 내려오면서 팔과 다리를 다 긁혔습니다.
불을 배우는 일
  • 본문 이미지

불을 붙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누군가 이제껏 삶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 다면 저는 단연 무인도에서 혼자 7시간 만에 불을 붙였을 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탁 하면 불꽃이 튀는 성질의 돌이라도 있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대신 잘 마른 대나무를 찾아 마찰열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연기라도 나지 않으면 애초부터 희망을 가지지 않았으련만, 드문드문 나는 연기에 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불씨를 본 것도 몇 번 되지만 정작 불쏘시개로 쓴 대나무 껍질에 옮겨붙지 못해 여러 번 실패했습니다. 가스레인지로는 1, 2초면 붙는 불인데, 직접 불을 붙이는 것이 이렇게 간절하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 본문 이미지

불을 붙이는 것도 붙이는 것인데 막상 붙이고 나니 불씨를 지키는 것이 더 관건이더군요. 나무에 올라가는 것만 생각하고 내려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처럼요. 불을 유지하기 위해선 땔감도 있어야 하고 적당히 바람도 불어야 합니다.
몇 번이나 불을 꺼뜨린 다음에야 불씨를 저장하는 법도 알았습니다. 큰 나무 장작을 태우는데, 한 쪽 면만 태우면 둥글게 옆면만 타게 됩니다. 그 속으로 불씨들이 들어가 있는데 이를 엎은 후 모래에 묻으면 됩니다. 타들어 간 나무를 엎으면 가운데가 뚫려 있고 그 속에 불씨가 들어가 있는데요, 모래를 걷고 나서도 그 속에 산소가 있어 불씨는 안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 본문 이미지

그렇게 차츰 무인도에 적응해나가면서 2주 차가 됐을 땐 적어도 먹을거리는 걱정하지 않을 정도가 됐습니다. 언제 고기가 많이 나타나는지, 해는 언제 지고 언제 뜨는지, 물은 언제 들어왔다 빠져나가는지 등을 알게 된 것입니다. 덕분에 고기도 많이 잡을 수 있게 됐습니다. 낚싯대도 며칠을 드리우니, 어느 정도 내렸을 때 고기가 잘 잡히는지 느낌이 온다고 해야 할까요. 작살을 들고 바다에 들어가서도 굶지 않을 만큼의 고기를 잡았습니다. 밤에 바다에 들어가면 고기들이 가만히 자고 있는데, 고기도 잠을 잔다는 사실을 이때 알았습니다.
  • 본문 이미지

물론 여전히 시행착오가 많았습니다. 고기를 굽는다고 나뭇가지로 꼬챙이를 만들었습니다. 주둥이에서 꼬리를 관통한 나뭇가지를 돌려가며 불에 고기를 익히는데 익으면서 살이 연해져 불구덩이 속으로 고기가 훅 빠지기도 했습니다. 냄비로 써보려고 코코넛을 반으로 가른 뒤 물을 끓이는데 재가 들어가 먹지 못하기도 했고요, 잡아둔 해삼을 햇볕에 너무 오래 두어 먹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미끈한 액체를 뿜으면서 속의 것을 모두 게워내며 죽은 해삼이었습니다.
오롯한 자연으로부터
  • 본문 이미지

셋째 주부터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잡아둔 생선을 말릴 정도니 먹을 거리에 대한 걱정도 없었고, 불을 피우는 것에 대한 걱정도 없었습니다. 나뭇가지를 해변에 꽂아두고 그림자를 보며 시간을 볼 여유가 생긴 것이지요. 드디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가져온 책의 첫 장을 펼쳤습니다.
  • 본문 이미지

사실 무인도에서의 삶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에 읽고 싶던 책을 왕창 들고 갔습니다. 하지만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나무를 구하고, 집을 짓고, 불을 피우면서 땔감을 구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갔습니다. 게다가 물 한 방울을 구하기 위해 한나절을 불 앞에 있어야 했고,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구해 온다 해도 한참이 지나야 먹을 수 있었습니다.
  • 본문 이미지

세상에 버려진 듯 덩그러니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 정말 사람이 살기 힘든 조건이기에 무인도로 남겨져 있지만 그 속에서 배운 것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휴대폰이 그렇게 오래도록 꺼져있다는게 제겐 너무나도 값진 일이었습니다. 여행을 가더라도 항상 일을 핑계로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던 제가 처음으로 며칠, 아니 몇 주간 휴대폰을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 저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또, 다른 무엇인가에 이렇게 집중한 적도 처음이었습니다.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3주를 무인도에서 살았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도 있고요, 잔잔한 파도가 치는 조용한 바다에서의 고요도 좋았습니다. 다 벗고 바다로 뛰어들어가 보는 것, 무수히 많은 별을 만나는 시간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 본문 이미지

무인도는 그래서 무인도인가 봅니다. 현지 사람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라는 뜻으로 무인도라 했지만, 조금 다르게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들이 모두 가능한 곳, 오직 세상과 나, 파도와 별과 고요와 푸른 빛만이 가득한 곳으로요. 그래서 사람의 것들이 아닌 순전한 자연이 전부인 곳.
무인도는 그래서 무인도인가 봅니다.
  • 본문 이미지

Comment Icon
댓글
0
프로필 썸네일 이미지
BESbsw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