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축제와 먹방! 여긴 벨리즈 [벨리즈시티, 벨리즈]

조회수 37
벨리즈시티에서 음식과 축제를 함께 즐기다
이 이야기는 여행잡지 Artravel #08호에 게재된 여행작가 신예희님의 여행기입니다. Artravel과 위시빈의 협업을 통해 지면에 모두 담지 못했던 사진과 방문했던 명소 정보들을 추가해 Artavel 매거진에 실렸던 특별한 여행이야기를 다시 발행합니다.
  • 벨리즈시티

    Cor H and, 17th St, Belize City, 벨리즈

축제와 먹방! 여긴 벨리즈
  • 본문 이미지

메스티소(Mestizo), 크리올(Kriol), 마야(Maya), 가리푸나(Garifuna), 메노나이트(Mennonite). 벨리즈에 모여 살고있는 민족과 인종의 이름들이다. 여기에 에스파냐인과 인도인, 그리고 세계 어디에나 있는 중국인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다문화 국가의 표본인 셈. 땅덩이가 넓기나 하면 모를까 벨리즈는 멕시코와 과테말라 사이에 자리 잡은, 경상남북도를 합친 것과 비슷한 크기의 푸릇푸릇한 신생 독립국. 민족과 인종의 용광로면서 이렇다 할 분쟁이 없는 평화로운 곳. 어딜 가든 자랑스레 걸어둔 국기가 펄럭이며, 감정 표현 풍부하고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가득한 곳, 무엇보다 언제든지 엉덩이를 신나게 흔들 준비가 돼 있는, 제대로 놀 줄 아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벨리즈로 출발!
통 큰 벨리즈시티 엉덩이를 좌우로
  • 본문 이미지

벨리즈 제 1의 도시는 카리브해 연안의 벨리즈시티(Belize City)다. 영국령 온두라스(British Honduras)라는 이름의 영국 식민지였던 시절부터 벨리즈시티가 이 지역의 실질적인 수도 역할을 수행했는데, 지난 1981년 독립을 쟁취하고 벨리즈시티에서 따온 벨리즈라는 국가명을 정식으로 공표한 후(즉, 이 도시의 역사가 국가보다 더 긴 것이다) 매년 불어 닥치는 허리케인의 습격을 피해 내륙 도시 벨모판(Belmopan)으로 행정수도를 이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제공항을 비롯한 편의시설과 다양한 볼거리들은 대부분 벨리즈시티에 집중돼 있어 여행의 시작과 끝은 어떤 식으로든 이 도시에서 맞이하게 된다.
  • 본문 이미지

매년 9월이 되면 벨리즈 방방곡곡은 독립 기념일 축제로 들썩인다. 분명 우리에게도 8월 15일의 광복절이 있지만 TV로 기념행사를 시청한다던가(그마저도 진득하게 보는 일이 무척 드물다) 각자의 가정에 국기를 게양하는 것 외엔 딱히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하는 일이 없다. 게다가 부끄럽게도 최근에는 국기 게양을 잊는 일이 잦아졌으니 광복절의 의미를 깊이 생각할 리도 만무하다. 그저 하루 노는 날, 반가운 공휴일이라는 느낌. 그런데 벨리즈에선 놀랍게도 꽤나 길고 긴 독립기념일 축제를 벌인다. 정확히는 11일간의 축제. 18세기, 지금의 벨리즈에 해당하는 중남미 멕시코와 과테말라 사이의 자그마한 땅을 두고 스페인과 영국 간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긴 싸움 끝에 영국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이 땅은 영국의 식민지가 돼 영국령 온두라스라고 불렸는데(그 영향으로 벨리즈는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이다), 1950년대에 원주민들이 뜻을 모아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드디어 지난 1981년에 정식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영국이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날인 9월 10일(내셔널데이 national day라고 부른다)부터 독립을 선포한 9월 21일까지 쭉 축제 기간으로 지정했으니 벨리즈 사람들, 무척이나 통이 크다.
  • 본문 이미지

모든 행사의 중심은 역시나 제 1의 도시 벨리즈시티인데, 클래식과 힙합을 넘나드는 다양한 장르의 거리 콘서트는 물론이고 댄스 경연 대회와 축제의 여왕 선발대회, 화려한 거리 퍼레이드 등 11일 내내 행사가 쉴 새 없이 줄을 잇는다. 이제 보니 통만 큰 것이 아니라 체력도 좋다. 특히 벨리즈 남부의 가리푸나인이 자랑하는 리드미컬한 음악이 기막히게 멋진데, 사슴과 염소 가죽을 팽팽히 당겨 씌운 북을 손바닥으로 타다다다 두드리며 부르는 근사하고 구성진 노래는 지난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흥 많고 끼 많은 벨리즈 사람들은 이 가리푸나 음악 연주가 시작되면 엉덩이와 골반을 정신없이 흔들며 파도를 타듯 기가 막히게 리듬을 탄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몸에 착착 감기는 춤이라 점잔 빼며 구경을 하다가도 어느새 절로 박수를, 어깨춤을, 그리고 결국엔 함께 엉덩이를 흔들게 된다.
  • 본문 이미지

11일간의 축제 기간, 그 하이라이트는 역시 마지막 날인 독립 기념일 당일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지난밤 자정을 넘어서까지 콘서트와 불꽃놀이로 무척이나 떠들썩했던 벨리즈시티 시내 중심의 아담한 공원으로 향한다. 이 작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 모두 오늘은 한 장소에 모여 독립을 축하하는 것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나같이 잔뜩 흥분한 상태. 벨리즈 국기를 모티브로 한 모자와 티셔츠를 입고, 심지어 애완견에게도 국기로 옷을 만들어 입힌 중년 신사에게 멋지다는 인사를 건네자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소매를 걷어 올린다. 팔뚝 가득 Belize라는 큼직한 문신이 새겨져 있다. 벨리즈를 정말 사랑하는군요? 나의 질문에 금세 눈물을 보인다. 1981년의 독립, 그 역사적인 날이 바로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고 대답한다. 이들에게는 국가의 독립이 동시대의 큰 사건인 것이다. 여전히 식지 않은 감격과 감동이 여행자의 마음마저 울린다. 새삼 주위를 다시 둘러보니 벨리즈 국기는 물론이고 국가를 상징하는 파란색과 빨간색, 하얀색의 깃발이 온 시내를 물들이고 있다.
  • 본문 이미지

슬슬 벨리즈 요리를 털어볼까?
  • 본문 이미지

행사가 열리는 공원은 벨리즈 최고의 축제답게 근사한 먹을거리로 가득하다. 수많은 노점의 음식 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벨리즈의 주식 라이스 앤 빈스(Belizean rice and beans)다. 쌀과 콩인 셈인데 여기서 말하는 bean은 red bean, 즉 팥이다. 쌀과 팥은 슈퍼마켓이든 전통시장이든 가장 눈에 잘 띄는 명당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벨리즈의 주식 대접을 톡톡히 받는 것.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팥밥과는 꽤 차이가 있는데, 우선 물에 담가 퉁퉁 불려 놓은 팥과 다진 마늘, 다진 양파를 냄비에 넣고 팥이 으깨질 정도로 푹 익힌다. 코코넛 밀크를 넣어 부드럽고 향긋하고 기름진 맛을 더해주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다음 고슬고슬하게 지은 하얀 쌀밥을 넣어 잘 섞으면 라이스 앤 빈스 완성! 구수하고 향긋하며 짭짤하고 고소한 게 입에 착 붙는다. 우리가 주로 먹는 찰진 쌀이 아니라 끈기 없고 푸슬푸슬한 기다란 쌀로 지은 밥인데, 코코넛 밀크 특유의 향기와 절묘하게 어울린다.
  • 본문 이미지

간이 잘 배어 있으니 라이스 앤 빈스만 한 접시 먹어도 충분히 맛있는데 벨리즈 사람들은 이걸 다양한 음식에 두루 곁들여 먹는다. 통통한 새우 살이 듬뿍 든 새우 부리토(burrito)를 주문하든, 매콤하고 알알하게 볶은 크리올(kriol) 스타일의 로브스터를 주문하든, 바삭한 닭튀김과 맥주를 주문하든 라이스 앤 빈스는 언제나 함께 식탁에 오른다. 이쯤 되면 벨리즈 공기밥이라고 해도 되겠다. 축제 행사장에선 특히 드럼통 바비큐와 함께 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데, 드럼통을 반으로 갈라서 안에다 뜨거운 숯불을 피워 넣은 다음 철망을 얹어 두툼하게 썬 돼지 어깨 살이라던가 등뼈, 닭다리 등을 지글지글 굽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원하는 고기를 고르면 직접 만든 소스를 척척 발라 앞뒤로 한 번 더 구워준 다음 라이스 앤 빈스를 듬뿍 곁들여 일회용 접시가 넘치도록 담아준다. 뭘 주문하든 푸짐하니 벨리즈에선 다이어트는 잠시 잊는 것이 좋다.
  • 본문 이미지

뜨끈한 국물이 없으면 허전한 사람들에겐 카우 풋 수프(cow foot soup)가 딱이다. 이름 그대로 우족탕인데, 벨리즈 고유의 해장용 음식이기도 하다. 깨끗이 씻은 우족을 끓는 물에서 20분가량 익힌 다음 첫 물을 따라 버리고 깨끗한 물을 부어 다시 끓인다. 여기에 타임(thyme)과 오레가노(oregano), 코리앤더(coriander) 같은 향이 강한 허브를 듬뿍 넣어 누린내를 잡아주면서 우족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계속 끓인다. 고기만 넣으면 아쉬우니 감자와 당근, 양파, 마늘 등의 채소와 마카로니를 넣고 연신 푹푹 끓이다 마지막으로 소금, 후추 간을 하면 완성. 이 수프의 핵심은 역시 오래오래, 세월아 네월아 끓이는 것이니 우리의 곰탕이나 도가니탕과도 어느 정도 닮았다. 한 숟갈 떠서 후루룩 들이마시니 위 아래 입술이 쩍 하고 달라붙을 정도로 진국이다. 허브 향기도 근사하다.
  • 본문 이미지

진한 고기 국물이 부담스럽다면 블루 크랩 수프(blue crab soup)는 어떨까? 신비한 푸른빛을 띈 민물게 수프다. 초여름부터 초가을 사이 벨리즈의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 블루 크랩들이 도로를 영차 영차 가로질러 건너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저러다 차에 치이는 것 아닐까 무척 걱정되는데, 실제로 매년 이 계절엔 수많은 블루 크랩들이 2세를 위해 뭍에서 물가로 이동하다 차에 치여 생을 마감하니 고속도로 주변엔 으깨진 게 껍질과 살점, 게 특유의 비린내가 진동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때를 노려 공짜 블루 크랩을 양동이 그득히 담아 집에 가져가 요리해 먹거나 시장에서 팔곤 하는데, 큼직한 양동이 가득 1 BZD(벨리즈 달러, 0.5USD에 해당) 남짓이니 무척 싸다. 축제에서 만난 벨리즈식 블루 크랩 수프는 게살뿐 아니라 오크라와 바나나, 코코넛 밀크도 듬뿍 들어 있어 질감이 걸쭉하고 맛이 독특하다.
  • 본문 이미지

여기서 말하는 바나나는 실은 플란테인(Plantain)이라는 이름의, 말하자면 바나나의 사촌쯤 되는 과일이다. 아니, 채소에 더 가깝겠다. 돼지호박에 버금갈 정도로 큼직하고 굵직한 초록색 플란테인에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면 달콤한 과일의 향기 대신 채소에서나 날 법한 풋내가 폴폴 풍긴다. 날것으로는 거의 먹지 않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찌거나 끓여 으깨기도 하고, 통째로 그릴에 올려 지글지글 굽거나 얇게 저며 바삭한 튀김을 만들기도 한다. 블루 크랩 수프뿐 아니라 다양한 요리에 다양한 형태로 곁들일 수 있는 전천후 식재료다.
어이 거기! 뭐가 그렇게 급한가요?
  • 본문 이미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륵 흐르는 벨리즈인데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음식을 맛보려니 차가운 음료 생각이 간절하다. 모두들 같은 생각인지 벨리킨(Belikin) 맥주 부스엔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맥주를 주문하면 유리병에 담긴 걸 다시 종이컵에 콸콸 따라서 내어 주고 병은 치운다. 축제 기간인 만큼 혹시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다.
벨리즈 제1의 맥주 브랜드인 벨리킨은 동쪽으로 가는 길(Road to the East)이라는 뜻의 마야어다. 라벨에도 마야 유적지인 알툰 하(Altun Ha)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벨리즈의 원주민인 마야인을 기념하는 의미일 것이다. 하긴, 40도가 넘는 한낮의 땡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알툰 하 유적의 수많은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절로 맥주 생각이 나니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대부분의 생활용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벨리즈에선 공산품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데, 초콜릿이나 과자 한 봉지를 사든 성냥이나 휴지를 사든 모두 수입품이다. 하지만 이 벨리킨 맥주만큼은 자랑스러운 벨리즈 고유의 상표. 독립 기념일 축제를 비롯해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릴 때면 으레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제일 커다란 천막을 펴고 맥주를 한없이 제공한다. 심지어 기념품점과 공항 면세점에서도 벨리즈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벨리킨 로고가 담긴 셔츠와 모자, 가방과 맥주잔을 팔 정도니 벨리즈 사람들의 벨리킨 맥주 사랑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 본문 이미지

나무 그늘 아래, 사람들과 뒤섞여 앉아 땀을 식히며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고 있으니 어느새 몸도 마음도 느긋하게 풀어진다. 벨리즈에선 굳이 딱딱해질 필요가 없다. 'No shirts, no shoes... no problem.' 셔츠도 신발도 필요 없어, 아무 문제없어라는 이들의 캐치프레이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 더, 'Go slow'. 주문한 음식을 재촉할 때마다, 서둘러 길을 걸을 때마다 사람들이 으레 건네는 말이다. 뭐가 그렇게 급한가요, 천천히 가도 되는걸.
  • 본문 이미지

우리나라에 비해 매우 낮은 국민소득을 올리는 나라, 아직은 편의시설도 부족하고 매년 허리케인으로 큰 피해를 입는 나라. 하지만 벨리즈 사람들의 여유로운 미소는 단순히 숫자로 계산하고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자산이다. 맥주를 마시며 친해진 아저씨가 이런 말을 툭 던진다. '내 부모님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나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셨지만 난 더 나은 삶을 위해 다시 벨리즈로 돌아왔어'. 함박웃음으로 수긍하며 건배를 청한다. 축하해요, 독립기념일!
Comment Icon
댓글
0
프로필 썸네일 이미지
BESbsw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