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포르투갈 여행자를 위한 탐닉적 빵 연구 [리스본,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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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빵을 좀 믿으세요?
이 이야기는 여행잡지 Artravel #02호에 게재된 여행작가 신예희님의 여행기입니다. Artravel과 위시빈의 협업을 통해 지면에 모두 담지 못했던 사진과 방문했던 명소 정보들을 추가해 Artavel 매거진에 실렸던 특별한 여행이야기를 다시 발행합니다.
  • 리스본

    Lisbon Portugal

혹시, 빵을 좀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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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아침은 빵집에서 시작된다. 직접 구운 빵과 커피를 파는 곳이 말 그대로 어디든 널려 있다. 멀쩡한 테이블은 비워 놓고 모두 바에 다닥다닥 붙어 선 채 간단히 아침을 먹고 출근한다. 친절한 빵집 주인이 아시아 어딘가에서 왔을 여행자에게 의자를 권하지만 무슨 말씀, 저도 동네 사람들 틈에 끼어 같이 먹을 겁니다. 진열장엔 화려한 빵과 케이크, 머핀과 도넛이 가득하다. 뭐부터 시작할까 두근두근하지만, 일단 진정하고 다들 뭘 가장 흔하게 먹는지 분위기 파악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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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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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pão)이라 하면 보통 아무것도 넣지 않은 심심한 맨 빵을 뜻한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공깃밥 같은 것이다. 주먹 두 개 만한 타원형 덩어리로 겉은 바삭하고 속은 보드라운데 요걸 반으로 갈라버터를 듬뿍(정말 듬뿍!) 발라먹는다. 노릇하게 굽지도 않은 맨 빵인데 이렇게 맛있다니 반칙이야. 그 옛날 13세기엔 세금으로 빵을 징수하기도 했다. 서민들에게 세금을 걷으려 해도 가진 현금이 부족하니 대신 빵, 고기, 와인, 우유와 달걀 등 직접 생산한 먹거리를 가져갔다. 그 중 빵은 항상 인기 1순위였다. 고기나 와인을 제칠 정도라니 당시 그 위상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런 빵을 지금 내가 먹는다니 감개가 살짝 무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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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다(torr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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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스따 미스따(toasta mista)
또라다(torrada)나 또스따 미스따(toasta mista)도 기막히게 맛있다. 1인치 두께의 바삭한 토스트에 버터를 척척 발라 먹기 좋게 쓱쓱 썰어낸 또라다, 빵 사이에 치즈와 햄을 끼워 꾹 눌러 구운 또스따 미스따. 뒤집어도 보고 갈라도 봤지만, 딱히 신기한 재료를 숨겨 넣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맛이 좋아도 되는 걸까. 이게 바로 '빵 대국'의 위엄이다. 그러고 보니 빵이라는 단어도 일본을 통해 전해진 포르투갈어니 이 나라, 만만히 보면 안 되겠다. 정신 바짝 차리고 더 열심히 먹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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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루 드 아로즈(bolo de arro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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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루 헤이(bolo rei)
빵만큼 사랑 받는 것은 볼루(bolo). 조금 퍽퍽한 질감의 머핀 같은 과자류인데 어떤 재료로 맛을 냈는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제일 흔하게 먹는 것은 볼루 드 아로즈(bolo de arroz). 쌀가루를 넉넉히 섞어 반죽해 굽는데 생김새도 맛도 소박하고 구수하다. 한편 SNS에 냉큼 올리고 싶어질 정도로 화려한 것도 있다. 빨강, 초록, 노랑의 설탕 절임 과일과 견과류를 그득하게 얹은 볼루 헤이(bolo rei)다. 헤이(rei)는 왕을 뜻하는 포르투갈어로 크리스마스 명절에 먹는 후식이니 여기서 말하는 왕이란 예수 그리스도. 인구의 80% 이상이 천주교 신자인 나라다운 작명이다. 볼루 헤이는 1829년, 리스본의 빵집 콘페이타리아 나씨오날(confeitaria Nacional)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언제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전천후, 전국구 디저트가 됐다. 절로 몸서리가 쳐질만큼 달콤한데 포르투갈 사람들은 아침부터 이런 달달한 빵 과자를 잘도 먹는다. 단 것이 사랑 받는 나라라니, 좋은 곳이군!
  • 카페 마제스틱

    Rua de Santa Catarina 118, 4000-381 Porto, 포르투갈

커피는 잘못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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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커피 한잔 해야겠다. 포르투갈 커피의 기본은 진한 비까(bica)다. 비까는 말하자면 에스프레소와 비슷한데, 설탕 한 봉지를 소로로 뿌려 살살 저어 마시면 끝맛이 고소하고 달콤하다. 재료로 아라비카(arabica)와 로부스타(robusta) 원두를 7대 3의 비율로 블렌딩해 쓴다. 로부스타라니, 쓰고 독한 맛이 강해 우리나라는 인스턴트커피의 원료로 쓰는 것 아닌가 싶은데 포르투갈에선 커피의 풍미를 위해 개성이 다른 두 가지 원두를 적절히 섞는다. 심지어 로부스타의 가격이 아라비카보다 비싸다. 희소성 때문이다. 무조건 나쁜 원두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 배합하고 어떻게 로스팅하냐에 따라 가치는 얼마든지 달라진다. 꼭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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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소를 똑 닮은 비까가 너무 진하다면 비까 두쁠라(bica dupla)도 좋다. 비까 두 샷에 뜨거운 물 한 샷 분량을 섞은 커피라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느낌이다. 비까와 스팀밀크를 반씩 섞은 메이아 드 레이뜨(meia de leite)는 까페 라떼 애호가에게 권한다. 좀더 부드러운 맛을 선호하면 스팀밀크를 두 배로 넣은 갈라웅( galão)을 주문하자. 뭘 고르든 맛은 보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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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은 15세기, 일명 대항해시대를 통해 황금기를 맞이했다. 세계가 다 우리 손에 있다며 식민지를 마구 확장하고 온갖 귀하고 좋은 것들을 모조리 취했던 시기다. 인도의 고아에서 커피 묘목을 가져다 브라질에 옮겨 심은 것도, 동티모르의 정글을 커피 농장으로 바꾼 것도 모두 그 시절 포르투갈인이 한 일이다. 좋은 커피를 마음껏, 욕심껏 취했으니 입맛이 까다로워진 것은 당연하다. 지금도 1인당 커피 소비량은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 적은 편이지만 원두의 질에는 무척 민감해 까다롭게 맛보고 수입한다. 포르투갈 여행에선 고풍스러운 카페를 순례하며 커피 맛을 비교하는 즐거움을 빼놓으면 섭섭하다. 1800년대 초반에 문을 연 곳을 비롯해 1920, 30년대의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건축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도 많다. 정치, 문화, 예술 종사자들의 사교 클럽이기도 했으니 포르투갈의 역사와 함께한 장소들이다. 지금은 현지인들과 여행자들로 언제나 북적북적.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선 포르투갈이 왠지 조용하고 한적한 나라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직접 걸어 보고 부딪쳐 보니 실로 관광 대국이다. 매년 받아들이는 엄청난 여행자의 수만큼 그들을 위한 인프라 수준 역시 높다.
  • 파스테이스 데 벨렝

    R. de Belém 84 92, 1300-085 Lisboa, Portugal

디저트 비밀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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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 달콤한 디저트를 좀 더 먹어본다. 잇몸이 아릴 정도로 박력 넘치는 달콤한 케이크와 파이류는 파스텔(pastel)이라고 통칭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건 단연 파스텔 드 나타(pastel de nata), 일명 에그 타르트다. 어느 빵집, 어느 카페에 가든 먹을 수 있지만, 이왕이면원조를 찾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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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한 유적지가 모여 있는 리스본의 벨렝(Belém) 지구를 걷다 보면 짙은 파란색 차양 아래 길게줄을 선 사람들이 눈에 딱 들어온다. 그 주변엔 하얀 종이 쇼핑백을 한두 개씩 소중하게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파스테이스 드 벨렝(pastéis de Belém), 제대로 찾아왔구나. 무려 1837년에 문을 열었다는 이 큰 규모의 제과점에 오로지 파스텔 드 나타 한 가지만 만들어 팔 리는 없지만(다양한 케이크와 파이, 페이스트리와 푸딩, 빵과 샌드위치가 가득하다) 모두들 그것만 애타게 부르짖는다. 하긴, 여기까지 먼 길을 와서 줄까지 한참 서서 기다렸는데 가장 유명하다는 것을 먹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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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파스텔 드 나타 다섯 개를 주문한다. 일단 한 개는 그냥 먹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테이블에 놓인 시나몬 파우더와 슈가 파우더를 각각 뿌려 먹고, 네 번째는 두 가지 파우더를 모두 뿌려 먹은 후 제일 마음에 든 방식으로 마지막 파스텔 드 나타를 먹는다. 그래서 결론은? 모두 맛있다는 것! 한 입 베어 물면 아주 얇은 페이스트리가 입안에서 겹겹이 바사삭 사라락 흩어지면서 달콤하고 보드라운 달걀 크림이 입 천장과 혓바닥에 쫙 퍼진다. 지나치게 달지 않고 침착하며 섬세한 맛과 촉감. 그래 바로 이거야. 어디서든 팔고 있는 흔한 디저트라 이제는 맛이 평준화 됐으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비교할 수 없는 맛이다. 파스테이스 드 벨렝의 직원들은 대부분 머리가 하얗게 센 어르신들이다. 공간이 넓고 테이블도 한없이 많으며 손님도 정신없이 드나드는 곳인데 연륜 넘치는 정확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진정한 프로들이다.
  • 제로니모스 수도원

    Praca do Império 1400-206 Lisboa, Portug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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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텔 드 나타는 길 건너편의 제로니무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옛날 옛적 중세 포르투갈의 수도원에선 수도사들의 옷 주름을 빳빳하게 펴거나, 와인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용도로 달걀흰자를 사용했다. 남아도는 노른자로 뭘 할까 연구한 결과가 바로 파스텔 드 나타인데 식탁 위에 데뷔하자마자 수도원 식구들에게 대 히트를 했다고 한다. 얼마나 맛이 좋았던지 레시피를 외부로 유출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자기들끼리만 냠냠 나눠 먹었을 정도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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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던 어느 날 리스본에 대지진이 발생해 도시 대부분이 큰 피해를 입고 왕궁마저 와르르 무너진다. 1755년의 일이다. 대지진을 계기로 그전까지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식민지를 신나게 확장하던 포르투갈의 좋은 시절이 서서히 막을 내리는데, 프랑스와 영국의 심한 정치적 간섭으로 급기야 왕이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피신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어렵사리 외세를 몰아낸 후 본국으로 귀환한 왕은 대지진 때 무너진 왕궁 대신 히에로니무스 수도원에 임시로 거처하게 됐고, 수도원 식구들은 하루아침에 살 곳을 잃고 전국의 수도원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대대로 내려온 파스텔 드 나타의 레시피를 품속에 고이 감추고 있던 요리 담당 수도사가 레시피를 눈독 들이던 근처의 제과점 주인과 계약을 맺고 제조법을 넘겨줬다. 1837년, 파스테이스 드 벨렝(pastéis de Belém)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현재도 오직 5명에게만 레시피가 전수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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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 충전도 한껏 했겠다, 문제의 수도원을 돌아본다. 원래 이 땅에는 뱃사람들의 수호성인 성 제로니무스를 섬기는 작은 교회가 있었다. 포르투갈의 황금기인 대항해시대의 기틀을 마련한 '항해왕' 엔리케 왕자가 지은 곳으로, 그는 출항을 앞둔 선원이라면 누구나 이 교회에 와서 무사 귀환을 바라는 기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하나의 전통이 돼 엔리케 왕자 사망 후에도 계속됐는데 1497년 바스쿠 다 가마 역시 그 작은 교회에서 밤샘 기도를 마치고 배에 올랐다. 밤샘이라니, 항해 첫날 컨디션은 괜찮았을까 걱정되긴 하지만 약 3년 후 어마어마한 보물을 들고 금의환향을 했으니 기도의 효과가 있긴 있었던 모양. 당시의 왕 마누엘 1세는 이 흡족한 수확에 큰 감명을 받아 기존의 교회 자리에 무척 화려한 수도원을 지었다.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 가마의 관은 수도원 바로 옆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에 안치돼 있다.
사우다드,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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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앞 큰길을 건너 공원을 가로지르면 바다로 착각할 만큼 드넓은 떼주 강을 만난다. 떼주 강은 이베리아 반도를 길게 관통해 흐르다 이곳에서 대서양의 바닷물과 섞이기 때문에 바다라 볼 수도 있다. 떼주 강변을 거닐다 보면 높이 52m의 거대한 조형물이 눈을 사로잡는다. 일명 ‘발견기념비’. 엔리케 왕자 사망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1960년 떼주 강변, 대서양을 바라보는 지점에 세워졌다. 당시 상당한 진보 인사였던 엔리케 왕자는 탐험가들이 자유롭게 항해하며 식민지를 탐험할 수 있도록 특혜를 베풀었다. 포르투갈 입장에선 미래를 내다 본 영웅이었다. 반면 식민 지배를 당한 국가의 입장에선 침략자인 것. 누군가에겐 영광스러운 모험이 누군가에겐 날벼락인 셈이다. 발견 기념비의 양면에는 포르투갈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인물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맨 앞에 당당히 선 엔리케 왕자를 비롯 바스쿠 다 가마, 페르냥 드 마갈량이스(페르난디드 마젤란) 등 대항해 시대를 열고 이끌어 가는데 일조한 인물 총 33명이다. 영광스러운 표정으로 대서양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에 왠지 울컥한다. 일제 강점기를 겪은 국가의 국민으로 식민 지배는 범세계적 범죄의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한편으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여행자로서 흥미진진하게 보고 즐기는 것 중 식민 지배의 흔적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것 역시 안다. 심지어 쓰라린과거의 흔적이 지금은 명물이 되어 관광 수익을 창출하니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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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항해시대. 당시 포르투갈어가 국제 공용어로 통했다니 위상이 대단하긴 했던 모양이다. 없는 항로를 만들어가며 망망대해로 나간다는 것은 몹시 위험했지만 일단 무사히 귀환하면 문자 그대로 초대박, 얼마나 유혹적인가. 배 5척, 선원 300명으로 위풍당당하게 출발했다 겨우 다 부서진 배 한 척에 18명의 생존자만 귀환했던 마젤란의 항해는 손해가 막심했겠다 싶지만 그 한 척에 싣고 온 물건들로 모든 손해를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큰 이익을 남겼다 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포르투갈 왕실에서 해외 무역 사업에 국고를 쏟아 부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문제는 그사이 내수 경제가 엉망이 됐다는 것, 게다가 선원과 군인이 모두 바다로 나가 국가 보안에 허점이 생긴 점이다. 힘으로 식민지를 개척했지만, 현지 원주민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으니 좋은 시절도 막을 내린다. 포르투갈 사람들을 관통하는 정서인 사우다드(saudade), 한과 비애, 아련한 슬픔 등으로 어설프게 번역하게 되는 사우다드 속엔 그 모든 이야기가 스며들어있다. 왠지 모르게 구슬프고 절절한 전통 가요 파두(fadu) 역시 그 영향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긴 세월을,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쳤어도 갓 구운 구수한 빵과 달콤한 디저트, 깊고 진한 커피의 맛은 여전히 좋다. 여행자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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