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사막의 춤, 사막의 노래 [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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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사막의 유목민 문화축제
이 이야기는 여행잡지 Artravel #07호에 게재된 엄민아님의 여행기입니다. Artravel과 위시빈의 협업을 통해 여행잡지에 모두 담지 못했던 사진들을 추가하고 디지털의 정보로 방문했던 명소들을 기록하여 독자분들에게 입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 암자라스

    Am-Djarass, 차드

텅 빈 하지만 텅 비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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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때 버킷리스트에 죽기 전에 남극과 사막에 가보겠다고 적었다. 그곳들은 현실에 만날 수 있는 작은 우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한없이 작아지는, 바람과 태양에 의해 지배되는 그리고 황량한-으로 형용되는 곳이 내가 상상해온 사막이었다. 사실 사막은 텅 빈, 하지만 텅 비지 않은 모순적인 곳이다. 척박한 환경에 살아가는 인간이 생존을 위해 창조해낸 문화들 때문이다. 북극에 사는이누이트족은 우리에게는 단지 '하얀' 눈일 뿐인 것을 표현하는데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형용사를 사용한다. 공간적 여백을 언어적 풍부함이 채우고 있는 것이다. 사막에도 뭔가의 풍부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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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모로코의 한 시장에서 만난 베르베르족이었다. 끊임없이 이동하며 유목민에서 수공예자, 무역상으로 모습을 바뀌어 살아가는 베르베르족의 삶은 사막이 품고 있는 역동성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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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킷리스트를 만든 지 딱 10년째 된 되던 해 나는 드디어 사막을 만나게 되었다. 1월의 차드에서였다. 사하라 축제에 가기 위해서는 차드 북부에 위치한 도시, 암자라스(Amdjarass)까지 이동해야 했다. 비행기를 타고 편히 이동하자는 친구에게 고집을 있는 대로 부려 결국은 차로 육로이동을 했는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그래도 그런 고된 여행은 늘 나름의 보상이 있는 법. 우리는 중간기착지였던 마을들에서 뻔한 호텔 대신(사실 호텔도 없지만) 이장님 댁에 머무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하룻밤만 재워달라는 청년들의 부탁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거나, 고개를 저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차드에서는이렇게 다른 마을에서 신세를 질 경우에 꼭 지켜야 하는 규칙이 한 가지 있다. 이장님과 마을의 이맘(지역의 이슬람 지도자)을 직접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것. 그 인사를 시작으로 마을의 지도자들과 이방인 사이에는 기꺼이 마을의 문을 열어준 데 대한 고마움과 자신들이 받아들인 손님을 떠날 때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 이 두 마음이 오간다.
무섭게 건조해진 공기로 사막이 가까워졌음을 실감한다. 공기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뜨겁고 따끔했다. 종종 나타나는 인류학 화석 발굴현장을 지날 때 나는 이 모래 아래 감춰져 있을 엄청난 이야기들을 상상해보곤 했다.
삶과 삶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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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암자라스에 도착했다. 기진맥진해있는 나와 일행들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우리를 행사장으로 데려다 줄 낙타 친구들이었다. 차드의 동물들은 차드인들처럼 하나같이 다리가 길고 몸이 말랐다. 3m가 넘는 키의 거대한 낙타들이 새색시처럼 꽃단장을 하고 있으니 감히 VIP 의전차량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사하라 사막의 유목민들은 낙타로 하루 평균 180km에서 200km가량을 이동한다. 자신들의 유일한 생계수단인 가축들에게 충분한 풀과 물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차드의 유목민들은 반정착 생활을 하는데, 짧은 우기 동안은 부족 단위로 마을에 모여 살다가, 건기가 되면 노인과 여성을 제외한 나머지가 가축 떼를 몰고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우기에 다시 돌아오는 식이다. 오늘날 여섯 개의 국가(모리타니아, 세네갈,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차드)로 쪼개어진 사헬지대의 유목민들은 여전히 사하라 사막을 관통하며 도시에서 그들이 가진 고기, 우유, 소금 그리고 대추야자를 옥수수, 설탕, 금으로 교환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축제에서 만난 한 원주민이 말했다. 당신들에게는 정착한 삶이 그렇듯 우리 유목민들에게는 이동하는 삶이 안정된 삶을 의미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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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들이 모여 텐트를 치고, 음식을 만드는 광경, 그 광경들에서 새어 나오는 들뜬 목소리들은 화려한 홍보물이나 스피커에서 빵빵 터져 나오는 최신가요보다 축제에 훨씬 더 그럴 듯하게 어울렸다. 순수하게 자연방목으로 키워진 소와 양들로부터 얻은 고기는 조금 질긴 감은 있어도 유목민들의 손을 거치고 나면 그 맛이 정말 일품이다. 고기를 먹으면 자주 탈이나 채식 위주로 살아왔는데, 사하라 축제 기간 동안은 배탈 한번 나지 않고 고기를 원 없이 먹었다. 그동안 너무 혀의 만족만 몰두하며 살지 않았다면 배에 무리를 주지 않고도 고기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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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시간은 원주민들이 마련해준 텐트에서 보내는 밤들이었다. 침낭에 들어가면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모래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모래들은 모두가 잠든 그 시간에도 멈추지 않고 바람을 따라 유랑을 지속하고 있었고, 그들의 움직임을 귀로 따라가다 보면 사하라 사막이 지나온 고단한 세월이 느껴지곤 했다. 1월 사하라 사막의 새벽 기온은 거의 영하에 가까웠다. 그래서 조용히 떠오른 사하라의 태양과 함께 따끈한 민트차가 맞이해주는 아침은 더욱 소중하고 반가웠다.
첫 번째 잔은 우리네 삶처럼 다정하고,두 번째 삶은 우리네 사랑처럼 강렬하고,마지막 세 번째 잔은 우리네 죽음처럼 쓰다.
차를 마시며 유목민들로부터 배운 인생이다.
사막의 위기에서 사막의 재발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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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1970년대부터 사헬지대에 주기적으로 찾아온 가뭄이 없었다면 사하라 축제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대인들이 돈을 따라 살아간다면 유목민들은 물을 따라 살아간다. 때문에 가뭄은 그들에게 거의 사망선고와 다름없다. 20세기 말부터 사헬지역에서 보코하람과 같은 테러집단이 생겨나고, 내전이 끊이지 않는 것은 가뭄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문제다. 종교나 종족 따위는 명목일 뿐 사하라 사막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들은 사실 한마디로 말해 '물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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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차드에서 사하라 축제가 시작된 것도 이러한 위기의식에서였다. 대신 축제는 사하라 사막의 문제를 보여주는 대신 가치를 보여주는 쪽을 택했다. 사막의 생태와 유목민들의 삶이 완전히 고립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외부세계와 접촉하며 변화해가는 살아있는 공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원주민과 170여명의 예술가들이 축제가 열린 7일 동안 함께 보여준 무대는 사하라 사막과 유목민들의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고립이 아니라 연대의 방법을 선택되어야 함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그들의 열정으로 암자라스에서는 해가 떠오르고 질 때까지 숨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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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사막에 붉은 모래 폭풍이 불어올 때 축제의 열기는 정점을 찍었다. 사막 마라톤과 낙타 경주가 시작됐다. 사막 마라톤에서 유럽의 참가자들이 상위권을 휩쓰는 바람에 이 사막의 주인들이 공히 체면을 구긴 게 아닌가 싶더니, 웬걸. 유목민들의 진짜 카리스마는 모래 위가 아니라 낙타 위에서 드러났다. 여행자들은 떨어질까 겁이나 몸이 송장처럼 굳어버리는 낙타 위에서 그들은 오히려 지상에서보다 편안한 얼굴로 60km/h에 가까운 속력으로 달리는 낙타들을 지휘했다. 야성미를 향한 나의 원초적 본능이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서 다시 깨어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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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음식경연대회, 예쁜 텐트짓기 경연대회, 예쁜 안장 만들기 경연대회서는 유목민들의 상상력과 재주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 단조로운 환경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들의 마음에 어쩜 그리도 알록달록한 그림들이 그려질 수 있는 것인지. '만일 네가 장님의 눈을 뜨이게 한다면, 그는 다시 암흑으로 돌아가길 원할 것이다.' 베르베르족의 속담처럼 어쩌면 그들은 사막에서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많은 것을 발견하고, 더 많은 것을 상상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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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사막에는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거나,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등의 철학적 내지 문학적 감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온전한 외로움을 느끼고 싶어 사막을 걷는다는데, 나는 사막에서 한 번도 고독해지거나 외롭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쉴 새 없이 웃고, 사람들과 만나며, 여행하고,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것이 내가 사하라 축제 기간 동안 유목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나누고 배운 것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유쾌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외롭지 않을 수 있는 방법 말이다.
보다 묵직한 깨달음이 찾아온 것은 오히려 번잡한 도시로 돌아온 후였다. 줄곧 "낮은 눈을 가졌고, 밤은 귀를 가졌다"는 유목민들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자연이 가진 섬세함에 대한 경의와 믿음으로 살아가는 탓에 함부로 화를 내거나, 욕심 부리지 않는다. 내 안이 자주 소란스러워지는 까닭은 내가 그들과는 달리 스스로 너무 많은 눈과 귀를 갖고 싶어 하기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나의 한계를 인정해버리면 될 것을. 그리곤 자연에 나를 좀 맡겨버리면 될 것을. 사하라 사막의 유목민들이 가진 대담함과 겸손을 나는 언제쯤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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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문화 축제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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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문화 축제[비자] 서울에 위치한 차드 영사관에서 신청 및 발급 가능(현지인 초대장 필요, 약 일주일 소요)
[개최시기] 매년 1-2월 사이 약 일주일간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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